등록 : 2005.04.17 21:20
수정 : 2005.04.17 21:20
과거사 정리가 한창이다. 국가정보원은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비롯해 일곱 가지 의혹사건을 조사 중이고, 경찰청도 지난달 29일 남민전 사건 등 10개 사건을 순차적으로 조사하겠다며 순위까지 공개했다.
지난 9일은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및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8명이 사형을 당한 지 꼭 30년 되는 날이었다. 이 사건은 국정원과 경찰의 조사 대상 과거사 가운데 유일하게 현재 재판에 계류 중이다. 가족들이 사건이 조작됐다며 재심을 신청해 법원이 3년째 심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재판을 지켜보면 “여러 과거사 조사 결과가 나오더라도 과연 사법절차를 통해 바로잡힐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사정은 이렇다.
이 사건은 1974년 4월 중앙정보부의 수사에 이어 6월 군법회의의 공판이 진행될 때부터 “고문으로 조작됐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다. 최근 공개된 당시 재판 및 수사기록을 보면 중앙정보부의 수사와 검찰의 기소, 1·2심 군법회의,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사법절차가 얼마나 엉터리로 진행됐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물론 유신 치하였으니까 그렇다고 하겠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대목이 적지 않다.
1심 결심공판에서 “애국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아 사형이니 무기니 구형하는 것은 ‘사법살인’이 될 수 있다. … 직업상 변호를 하고 있으나 차라리 피고인들과 뜻을 같이해 피고인석에 앉겠다”고 최후변론을 한 강신옥 변호사가 끌려나가 곧바로 구속된 뒤 2심에서 현역 육군대장인 재판장이 변호인들에게 앞으로 발언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장면은, 당시 재판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실관계를 깊이 따져야 할 1·2심에서 피고인들이 신청한 증거는 대부분 기각됐다. 특히 2심에선 항소이유서에 적힌 고문 피해 사실을 두고 피고인들을 직접 신문하겠다는 변호인의 요청조차 재판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피고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항의하자 재판부는 이들을 모두 법정 밖으로 끌어냈다. 법정에서 고문에 의한 조작 주장을 펼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당한 셈이다.
피고인들이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었던 대법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판결문은 “ㅇㅇㅇ 피고인이 검찰관 앞에서의 신문이 자유스런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고 진술한 사실이 있고, … 나머지 피고인들에 대해서까지 이런 판단을 하는 것은 형식논리적으로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없을지 모르나, … 합리적인 자유심증에 의해 원심 및 1심이 위와 같이 판단한 것은 정당하다” “원래 임의성 판단은 심판관의 자유스런 심증에 의해 결정지어지는 것”이라며 고문 주장을 배척했다. 일부 피고인들이 검찰에서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진술했다고 했고, 나머지 피고인들에 대해서도 1·2심 판사들이 고문이 없다고 판단했으니 믿을 수밖에 없다는 취지다.
하지만 2002년 9월 국가기관인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가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관과 교도관, 검사 등 129명의 참고인 조사 결과를 토대로 중정의 고문과 협박으로 조작됐다고 밝힘으로써 사실상 이 사건의 진위는 가려진 셈이다.
그런데도 이 사건 재심 여부에 대한 재판은 장기화하고 있다. 현행 형사소송법과 대법원 판례가 재심 요건을 매우 까다롭게 정해놓은 것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새 증거의 증거가치가 확정판결이 자료로 삼은 증거보다 경험칙이나 논리적으로 우위여야 하고” “피고인이나 참고인들의 진술이 수사기관의 강압에 의한 것으로 의심된다는 점만으로는 재심청구를 인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다른 사건들도 과거사 규명 작업을 통해 새 진상이 드러나더라도 법원에서 무죄를 받거나 누명을 벗는다는 보장이 없다. 과거 상처를 법적으로 ‘치유’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일부에서 특별법 필요성을 거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국정원이나 경찰이 과거 잘못을 스스로 밝히겠다고 나서는 것과 달리 법원과 검찰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판사는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했고, 검사는 ‘기소편의주의’에 따라 기소했으니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하면 사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강 변호사가 예언한 대로 ‘사법 살인’으로 결론이 난다면 법원과 검찰은 그 공범이나 방조범이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법원과 검찰이 끝까지 시치미를 떼고 넘어갈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김이택 부국장
?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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