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4.20 19:14
수정 : 2005.04.20 19:14
사법개혁추진위원회(사개추)가 형사배심제의 시안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이다. 형사배심제는 2012년부터 시험적으로 도입하기로 이미 결정한 바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을 두고 의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한 것 같다. 의원의 직역과 개인적 소신에 따라 의견이 다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고 또한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 배심제도의 핵심은 여러 사람들이 진지한 토론을 통해 하나의 결론에 이르는 데 있다. 배심제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민주주의의 교육장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아직도 배심제도 자체에 대해 적개심 내지는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지식인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는 공산당 식 ‘인민재판’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새삼스럽지만 우리 사법에 왜 배심이 필요한지 찬찬히 살펴볼 일이다.
재판은 사실의 인정과 법률의 적용, 두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법의 적용이야 물론 전문법관의 영역이다. 그러나 사실 인정의 문제는 다르다. 구체적으로 피고인이 혐의를 받고 있는 죄를 범했는지 아닌지는 전문법관이 판단하는 것보다 다수의 보통사람들이 의견을 모아 한 결론에 이르면 더욱 진실에 부합할 가능성이 높다. 배심의 평결은 다수결이 아니라 전원일치가 원칙이다. 그러기에 설령 배심이 합의로 그릇된 평결은 내린다고 할지라도 법관이 범할 오류의 가능성보다는 낮을 것이다. 피고인의 입장에서는 신분상 거리감이 강한 판사보다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일반국민의 판단을 받는 경우에 더욱 결과에 승복하기 쉬울 것이다. 그것이 민주적 정서이다.
우리나라의 사법제도는 세계에 유례 드문 직업법관의 독무대다. 판사의 임명에 정부나 일반국민이 관여할 여지가 전혀 없다. 판사 이외의 인물이 일체 재판에 관여할 수 없다. 그만큼 사법부의 독립이 보장된 반면 민주적 정당성과 대중적 신뢰가 취약하다. 판사의 초임연령이나 퇴임연령 또한 다른 나라들에 비해 너무나도 젊다. 게다가 우리처럼 판사와 검사의 자격요건과 지위를 동일하게 규정하는 나라도 드물다. 그러기에 오래전부터 판사가 피고인의 입장보다는 검사의 의견에 더욱 경청한다는 비판이 팽배해 왔다. 판, 검사를 싸잡아 한통속이라고 믿는 국민도 적지 않다. 이렇듯 극단적인 관료사법의 비판을 받는 사법부의 입장에서는 국민과 함께 책임과 의무를 나눔으로써 판결에 대한 정당성과 신뢰를 높일 수 있다.
아직도 배심제도는 판사의 ‘고유한’ 권한을 침해하는 제도라는 주장을 펴는 법조인도 있다. 민주주의의 본질을 모르는 시대착오적인 망상이다. 국민주권의 원리가 무엇인가?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입장에서 보자. ‘고유한’ 권한이란 국민이 주어야만 주장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관에 어떤 권한을 주는가는 국민이 결정할 몫이다. 그중 어떤 일은 국민 스스로가 행사하겠다고 하면 잘못된 일일까?
항간에는 여러 종류의 그릇된 속설들이 나돌고 있다. 이를테면 배심제도는 지구상에서 미국에만 존재하는 제도이고, 그나마 오 제이 심슨재판에서 보듯이 폐단이 큰 제도인데 왜 도입해야 하는가. 라고 비판한다. 절대 그렇지 아니하다.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이른바 영미법계 국가는 물론 프랑스, 스페인, 러시아 등 ‘대륙법’ 국가에도 존재한다. 문제는 범위와 정도의 문제이다. 한 가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강력한 행정국가가 등장할 때마나 배심제의 축소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배심의 폐해는 극단적인 사건을 외부인의 시각에서 수용하면서 발생한 과장과 왜곡이 십상이다. 일부 ‘전문가’ 들은 우리 국민이 편견과 감정에 치우치기 십상이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은연중에 국민을 얕잡아보는 비민주적인 세계관으로 새삼 비판할 가치조차 없다.
보다 걱정되는 일은 어떻게 국민의 참여를 확보할 것인가이다. 여태껏 배심제는 국민의 사법참여권이라는 ‘권리’의 관점에서 논의해 왔다. 권리를 실현하려면 공민으로서의 참여 의무를 부과해야만 한다. 세상이 온통 권리의 쟁취와 이익의 확보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세태에, 어떻게 자신과 이해관계 없는 일에 참여할 의무를 부여할 것인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본질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미국 샌타클래라 로스쿨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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