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4.21 19:11
수정 : 2005.04.21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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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길 사회부 행정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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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잰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현재와 과거 사이에 혁명적인 정치·경제 변화가 일어 가치관이 바뀌었다면 더욱 그렇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에 이어 홍석현 주미대사가 과거에 취득한 부동산이 요즘 우리들의 판단을 혼란스럽게 한다. 두 사람 모두 문제되는 부분이 위장전입을 통해 농지가 포함된 부동산을 취득한 것이다. 이 전 부총리의 부동산은 그가 유학 갈 때 땅 거래를 일임받은 변호사가 알아서 한 것이고, 홍 대사의 부동산 역시 부친이 그의 이름을 빌려 구입했다고 한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20년 이상 땅을 소유했거나, 지금도 소유하고 있다. 단기차익을 노린 의도적인 투기는 아니라는 얘기다.
이 전 부총리의 부동산 문제가 불거졌을 때 본인 쪽이나 청와대는 그런 것을 문제삼으면 지금 50~60대 이상은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홍 대사의 부동산에 대해 청와대는 “시세차익을 얻은 것이 없다”고 해명했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얘기다. 그들이 문제의 부동산을 구입했을 때 그런 관행은 그야말로 ‘관행’일 뿐이었다. 아무도 위법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그런 관행을 범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그런 땅을 살 여유와 기회가 있었다면, 그런 관행을 썼을 것이다.
지도층 인사이기 때문에 더욱 엄격한 도덕적 잣대가 요구된다는 말을 나는 무조건 수긍할 수도 없다. 구성원 전체가 그런 관행을 별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사회에서 도덕적 잣대의 기준을 어떻게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현재 만든 법으로 과거의 행위를 처벌할 수 없는 소급입법 금지의 원칙처럼, 최근에 엄격해진 도덕과 가치관을 과거일에 거슬러 적용하는 것은 불합리할 수 있다. 도덕의 소급적용 금지 원칙이다.
이런 연유들로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재량하지 말라는 얘기가 설득력 있게 들린다. 내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그 잣대가 현재의 잣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지에 사는 사람만이 농지를 구입하게 한 법은 경자유전의 법칙에 근거한 것이다. 고려 말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 실학자들이 완성한 경자유전의 법칙은 우리 역사가 온갖 시행착오와 비용을 치르며 확립한 토지정책의 최대 공약수다.
그건 그들이 토지를 구매할 때보다 500년 전부터 시작된 법칙이자 가치관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법칙이다. 곧, 토지를 생산적인 목적에 이용하는 사람이 소유하게 하자는 것이다. 500년도 넘은 법칙이자 가치관이 지난 40여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거의 통용되지 못했다는 것에 지금 우리 사회의 비극이 있다.
그 사이 우리 사회는 양적, 질적으로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했다. 그동안 우리 사회를 이끌어 왔던 주류들은 그런 성과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고 불평한다. 자학사관이라고까지 표현한다. 그런 성과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은 경제발전 과정에서 불거진 불평등과 불공평 때문이다. 그 불평등과 불공평은 경자유전의 원칙 같은 핵심 가치관이 훼손되면서 발생했다. 그 훼손을 누가 주도했는지 굳이 따지지는 않겠다.
그동안의 경제발전 성과가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 때문에 훼손되고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마치 자해공갈단의 협박 같다. 자신들이 스스로 훼손해놓고 상대방에게 물어내라고 협박하는 자해공갈단 말이다. 그들은 지금의 세태를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의 사관은 ‘자해사관’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출발점을 갖고 있다.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어떤 출발점에서 출발해 삶의 궤적을 그려왔다. … 문제가 되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도 국민에게 거북한 소리가 되겠지만 ….”
홍 대사가 자신의 재산을 해명하며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홍 대사나 이 전 부총리는 한국 주류에서 아주 괜찮은 사람이 분명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의 주류들이 지난 40여년 동안 땅을 위장전입을 통해 구입한 것처럼, 주류라는 지위로 ‘위장전입’한 것이 아닌가하는 점이다. 그래서 그 주류라는 지위로 위장전입한 그들의 자해사관에 발목잡힌 현재가 더욱 안타까운 것이다.
정의길 사회부 행정팀장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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