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4.22 18:25
수정 : 2005.04.22 18:25
지난 3월 노무현 대통령이 제기한 동북아 균형자론에 대한 보수 언론의 반발과 비난이 거세다. 문제는 어쨌거나 획기적인 이 외교적 비전에 대한 보수 언론의 반응이 근시안적이고 친미사대주의에 젖어있어 경청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한국의 보수 우익들이 동북아 균형자론를 반대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 안보의 근간인 한미동맹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인 듯하다. 이런 우려가 완전히 기우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한반도에 안보 문제가 대두될 때면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미국의 힘에만 의지하려 드는 안이한 태도가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가령 우리의 힘이 약한데 지구상의 유일 초강대국이자 우리의 유일한 동맹국인 미국의 비위를 거슬러서 되겠느냐는 주장이 그렇다. 이런 정태적이고 친미 사대주의적인 발상으로는 국내외의 주요한 안보 문제에서 매번 미국의 대리인 노릇밖에 할 수 없으니, 자주외교는 백년하청이다. 게다가 이런 굴종적인 태도가 냉전이후 소용돌이치는 현실정치에서 얼마나 약발이 있는지, 되레 역효과는 없는지 냉정히 따져봐야 한다. 두 가지 예만 들겠다.
최근에 알려진 한미연합사의 ‘작전계획 5029-05’는 북한 내부에 정권 붕괴와 같은 급변이 일어날 경우 주한미군과 한국군이 개입하여 군사적 조처를 취한다는 위험천만한 계획을 담고 있었는데, 다행히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이를 중단시켰다. 만약 우리 정부가 예속적인 한미관계의 관행에 따라 미국의 뜻대로 이 계획을 수용했다면 그 엄청난 결과를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최악의 경우 한반도는 또 한번 전쟁의 참화를 겪을 수 있거니와, 이 계획이 가상 시나리오로 남는다 해도 한반도 안보에는 백해무익한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명운이 걸린 중차대한 사안을 다른 나라의 의사결정에 맡기는 것 자체가 지극히 무책임한 짓이다.
또 하나는 대만의 독립 움직임을 둘러싸고 중국과 미국 사이에 불거진 갈등 문제이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은 급성장하는 중국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재촉하고 미일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대만의 독립을 부추기는 도발적인 정책으로 나아가고 있다. 지난 2월 미국과 일본이 미일안보협의회에서 대만의 안보가 양국의 ‘공통된 전략적 목표’라고 선언하자, 중국은 3월14일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대만이 독립을 추구할 경우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이를 저지한다는 ‘반국가분열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므로 3월22일 발표된 노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론에는 대만문제에 대한 불개입의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보수진영에서는 일본이 미일동맹을 강화하듯 우리도 한미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나온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중국을 경쟁상대로 인식하는 일본과는 달리 우리는 중국과 대립해서 득볼 것이 없다. 당장 북핵문제 해결뿐 아니라 장차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에 중국의 협조가 관건인 만큼 중국과의 대결에 나서는 미국과 일본의 위험한 공동전선에 가담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한·미·일 삼각동맹의 유효성을 부인하는 노 대통령의 발언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한미동맹이 우리 안보의 소중한 자산인 것은 분명하고 이를 등지고서는 어떤 안보전략도 수립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한미동맹에는 냉전 초기부터 축적된 대미 종속성과 미국 일방주의가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다. 한국군의 전시 군사작전권이 아직 미국에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그렇기에 한미동맹의 틀은 유지하되 이런 예속성을 수정하여 좀더 대등한 한미관계를 성취하는 것이 우리 자주외교의 출발점이며, 동북아 균형자론의 요체라고 여겨진다. 그럴 때만이 냉전 이후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동북아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한기욱/ 인제대 교수·영문학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