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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24 20:40 수정 : 2005.04.24 20:40

그해 임진년, 전란의 기운이 남해 바다에 무겁게 내려앉았을 때 중봉 조헌은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 부복했다. 며칠 몇 밤을 엎드려 그는 자신의 목숨과 전란 대비의 소신을 바꾸고자 했으나 역사는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조선의 백성을 밀어 넣고 말았다. 제주도 유배에서 돌아온 면암이 까칠해진 얼굴로 상경하여 거적대기 위에 엎드렸을 때 그의 곁에 놓인 것도 도끼였다. 강화도조약에 반대하는 ‘병자지부소’를 쓴 그 선비의 손이 붓 대신 도끼를 잡은 것 역시 굴욕적인 수호조약과 자신의 목숨을 맞바꾸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최익현은 반외세로 자기의 나머지 지조를 다한다.

대통령은 북녘 땅을 향해 얼굴을 붉히겠다고 하고, 비료지원의 약속은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독도분쟁의 핵심은 비껴간 채 정치권과 지식인들은 인기영합에만 몰두하고, 의식 있는 자들조차 현실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하기는커녕 오히려 위기가 기회라는 듯 차기정권을 위한 뒷거래에만 역량을 소진하고 있다. 이럴 때 중봉과 면암의 꼿꼿한 정신이 그리운 건 나만의 짝사랑일 것인가.

지난 총선의 결과가 밝혀지던 아침,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친일청산’ 문제였다. 보이는 곳에서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청산되지 못한 역사였다고 여겨왔던 터라 뜻있는 국회의원들이 다수를 차지한 입법부의 첫 번째 할 일은 바로 역사를 바로세우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 뒤에도 기대는 여전했고 늘 믿어왔다. 그런데 지난 60년 친일세력의 기득권은 콘크리트처럼 굳어질 대로 굳어졌단 말인가. 왜 열린우리당의 신기남 의원은 부친의 친일경력을 반성하지 않는단 말인가. 백번 양보한다 치자. 왜 친일을 통해 얻어진 부를 사회에 환원하지 못하는가. 이회영 형제가 가산을 정리해 독립운동에 헌신함으로써 남겨진 역사의 기록을, 더 커진 민족의 존경을 그는 왜 모르는가. 그런 한 치의 반성도 없이 시작된 열린우리당의 4대개혁입법안에 기대를 가진 건 과연 국민들이 우민하기 때문인가.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제 살을 도려내고 도덕성을 기반으로 한 개혁이 다시금 논의되어야 하리라 본다.

디제이는 한미공조라는 명제 앞에서 비굴해 보일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단어 하나에 심사숙고했다. 그렇지만 6·15선언을 이끌어내고 남북평화의 시대를 열어놓지 않았는가. 하물며 이를 통해 국민의 정신은 얼마나 많이 성숙했던가. 한반도 남쪽이라는 한계에서 동북아라는 큰 세계로, 이념의 굴레에 더 이상 농락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감은 디제이 시대가 남겨준 정신혁명이 아닐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정신혁명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런데 대통령은 미국에 대해 말은 시원하게 하면서 뒤로는 무릎을 꿇고 있다. 성숙한 국민들을 못 믿는 모양이다. 적어도 남북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얼굴 붉히지 말고 끊임없이 화해의 손길을 보내야하지 않겠는가. 오히려 민족문제에 대한 신조를 지키고 있다면 미국이나 일본에게 수치스럽게 손을 벌린다 할지라도 국민들은 대통령을 지지할 것이다.

이제 파종도 끝나 가는데, 대통령은 6자회담이나 고위급 회담을 전제로 하지 말고 북에 비료를 보내 주시라. 이건 약속이다. 이건 단순히 농업문제를 올해의 과제로 설정한 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건강한 북녘의 친구를 만나야할 후손들을 위한 일이며 남북문제에 관여하고 있는 민간과 경제분야 모든 사람들의 신뢰 문제이다. 정부의 자존심이 남북문제를 경색시킬 아무런 이유가 없다. 또 하나, 이제 곧 역사적인 6·15공동선언 5주년이 다가온다. 6·15선언을 이끌어내기까지 애쓴 모든 이들의 석방과 정치적 복원도 이뤄져야 한다. 특히 간첩죄로 복역중인 전 범민련 사무처장 민경우 씨는 6·15공동선언 1주년 기념행사와 그해 평양에서 개최된 8·15민간행사를 성사시킨 실재 주역이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 그 시간만큼 대통령은 6·15선언을 부정하고 있다는 걸 증명한다.

우리 집에는 늦둥이가 있다. 19개월이 됐는데 아직 ‘음매’ 소리밖에 못하는 이 녀석을 두고 친구들은 ‘대선 베이비’라고 놀린다. 웃기지 말라고 너스레를 떨지만 부인은 못한다. 주책없이, 태어난 날로부터 10개월을 역산해보면 분명 늦둥이를 가진 날은 대통령이 당선된 날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 속에서 날이 선 도끼를 들고 그가 나의 목을 치더라도 나는 그날 대통령이 우리에게 준 희망을 버릴 수 없다.

신동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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