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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27 19:05 수정 : 2005.04.27 19:05

몇 년 전 알게 된 어느 방송사 구성작가에게 연락이 왔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하는 말이, 아기를 낳게 되어 일을 쉬게 되었다고 한다. 눈치없는 변호사가 그럼 출산휴가 3개월 후면 다시 돌아오겠네, 했더니, 대답을 흐린다. 아, 그렇지. 그는 ‘프리랜서’였던 것이다!

구성작가나 컴퓨터 그래픽 요원, 리포터, 외부 제작요원. 이들은 모두 법률상으로는 개인 사업자로서 방송사와 도급계약을 맺고 있다는 이유로(그런데 실제로는 계약서조차 작성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근로자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출산휴가는 언감생심, “프로그램에 맞지 않는다”거나 “감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갑자기 프로그램에서 배제되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제작비 노무자”다. ‘화려한 프리랜서’들에게 노무자라니! 그러나 피디, 기자들에 대한 급여가 ‘인건비’인 것과는 달리 이들이 일한 대가로 받는 돈은 모두 ‘제작비’로 분류되니, 일단 그렇게 불러 보자. (지방자치단체에서 청소하는 직원들 급여를 ‘인건비’가 아니라 ‘재료비’로 분류한 것을 꼬집는 말로 ‘재료비 근로자’라는 말이 있다.)

라디오에 전화를 하거나 인터뷰를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출연자를 섭외하는 일에서 시작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은지, 어떤 장면을 찍을지 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대개 이들 ‘구성작가’의 일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면 다시 출연료 계좌번호를 알려주고 마무리하는 것도 이들이다. 어떤 화면에 어떤 자막이나 멘트가 들어가는지에 대한 콘티는 물론, 만든 테이프 편집에도 참여해야 한다. 그들의 임금은 원고의 양이 아니라 담당 프로그램의 시간에 따라, 방송사가 일방적으로 정한 ‘제작비 기준’에 의해 지급된다. 그 일이 프로그램 제작에 있어 필수적이고, 방송사 정규직 직원인 피디 등 스태프와 함께 팀을 이루어 피디의 책임과 주도 하에 업무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보면, 여느 직원과 다르지 않다. 진짜 프리랜서-잘나가는 드라마 작가들과는 달리, 매일 방송 시간에 맞추어 출근하고 퇴근해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들 “제작비 노무자”들은 근로자로 인정되지도 않으면서, 정작 이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프로그램의 전반적 성격을 결정하는 피디는 왜 정규직 직원인 것일까?

설명은 이렇다. “프로그램 연출자로서 제작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피디는 방송사 직원으로 고용하되, 프로그램의 계속적인 변화를 꾀하기 위해 구성작가의 업무영역은 그 업무특성 등을 고려하여 고용이 아닌 도급 내지 위임 형태로 충원하는 것은 방송사의 자유다!” 얼마나 간단한가, 그리고 뻔뻔한가. 어떻게 고용하든지 다 자유라는데.

구성작가나 리포터가 되고 싶은 사람은 많고, 상대적으로 일자리는 적어, 어떠한 조건을 제시해도 방송사로서는 아쉬울 게 없다. 한번 찍히면 소문이 나서 방송사 일자리 얻기도 어려워, 문제 제기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문제는 그렇지 않아도 여성에게는 제대로 된 일자리가 많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점점 더 많은 일자리가 ‘프리랜서’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불안정하게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서비스업이 발달하면서 새로이 등장한 직종들은 전통적 의미의 지휘·명령이나 규칙적인 출퇴근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이러한 지위가 당연시된다. 창의적이고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어 여성들이 선호하고, 그래서 드라마 여주인공으로 단골 출연하는 그녀들-방송사 구성작가, 리포터, 여행사 가이드가 대개 그렇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 그리고 한번 일자리에서 배제되면, 경력 회복은 물론 복귀 여부가 불투명한 현실 속에서, 오죽하면 엄마가 되는 경험 자체를 포기하게 되는 그녀들의 세계 최저라는 출산율, 그것도 120% 이해하게 된다.


김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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