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4.28 21:55
수정 : 2005.04.28 21:55
외환 당국의 고민이 깊어 간다. 지난 한 해 10조원이 넘는 외평기금 손실을 감수하면서 환율방어에 나섰지만, 결국 1000원선을 내줬다. 통안채 이자 비용까지 더하면 천문학적인 혈세를 비용으로 쏟은 셈이지만, ‘시장에 맞서지 말라’는 격언을 비켜갈 수는 없었다.
정부는 “외환 평가손은 장부상의 손실일 뿐이고, 수출 경쟁력을 유지해 기업 수익성과 세수 증대에 기여했다”며 억울해한다. 하지만, ‘환율이 얼마 하락하면 경상수지가 얼마 줄어든다. 따라서 국가경제 전체로 보면 환율관리에 들어가는 비용보다 효용이 얼마 더 크다’는 식의 구체적인 수치를 먼저 내놓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물론, 고환율로 물가와 내수에 부담을 준, 보이지 않는 비용도 함께 계산돼야 한다.
정작 문제는 이젠 외환 당국이 적정 환율을 1100원, 혹은 900원이라고 ‘암시’해도, 시장이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모두 업보다.
8년 전, 곳간은 텅 비어 있었다. 당연히 환율은 상승압력을 받았는데, 정부는 1000원을 지키겠다며 선물환 매도에 나섰다. 어처구니없는 개입이었다. 현물 달러가 없는데, 도대체 만기 때 뭘로 결제하겠다는 배짱이었을까. 투기세력이 때를 놓칠 리 없었다. 국책은행이 던진 선물환을 모조리 쓸어담았다. 만기가 다가오자 다급해진 정부는 방향을 180도 바꿔 달러 매수세력으로 돌변했다. 당시에는 가격 제한폭이 있었는데, 사려는 쪽만 있고 매도자가 없으니 달러-원 환율은 연일 상한가로 치솟았다. 사실상 외환거래가 정지된 것이다. 결국 가격 제한폭을 폐지할 수 밖에 없었는데, 환율은 2000원까지 로켓처럼 곧추 상승했다. 투기세력은 콧노래를 불렀고, 국민들은 눈물을 흘렸다.
세월은 흘렀지만 변한 건 없었다. 2년 전부터 달러화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하지만 당국은 ‘수출 경쟁력’을 내세우며, 세계적 추세를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1180원, 1140원 등에 지지선을 그어 놓고, 사실상 무제한 달러를 사들였다. 당연히 투기세력은 다시 덤벼들었다. 외환 당국은 ‘혼내 주겠다’고 공언하며, 역외선물환시장(NDF)까지 개입했다. 그러나 혼난 건, 이번에도 외환 당국이었다. 정부는 1조8천억원의 손실을 보고 후퇴했다고 실토했다. 하지만 손실이 지금도 진행 중인 것은 아닌지,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투기세력은 주식, 채권, 외환을 넘나들며 현란한 기법으로 공격했다. 정부는 그들의 매수에 힘입어 올라가는 주식시장을 쳐다보며 즐거워했다. 환율이 1000원까지 떨어지고 달러화가 반등할 기미가 보이던 지난 2월, 투기세력은 주식과 환 양쪽에서 단물을 빼먹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정부는 ‘실탄’을 마련하기 위해 하루가 멀다하고 외평채 발행한도를 늘렸다. 풀린 통화를 흡수하려 통안채를 발행했고, 그 이자를 흡수하는 통안채를 또 발행해야 했다. 그 결과 통안채와 외평채 잔액이 200조원에 이르러 통화운용에 부담을 주고 있다. 외환 보유고는 2000억달러를 넘어서, 정부 스스로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뒤늦게 비달러화 자산을 늘리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외신에 보도되자마자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을 쳤다.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외환 당국의 개입 자체가 옳은지, 그른지를 따질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최소한 개입 시점이, 개입 방식이, 비용 규모가, 설득력이 있었느냐 하는 대목에는 고개가 ‘갸웃’해 진다.
외환정책은 소수 엘리트 관료와 고도로 전문화된 집단에 의해 집행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결과는 철저히 ‘객관적으로’ 평가돼야 한다. 어떤 모델로 분석했는지, 포지션 위험도를 얼마나 자주 점검했는지 등도 반드시 검증받아야 한다. 그래야 국가 외환 위험이 관리된다. 국회와 감사원이 있다고 하지만, 그 안에 위험을 계량화할 만한 독립적 전문기구에 있다는 얘기는 과문한 탓인지, 들어보지 못했다. 전통을 자랑하던 베어링은행의 파산은, 통제받지 않는 소수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보여준다.
김정곤 경제부 정책·금융팀장
kk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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