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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01 19:43 수정 : 2005.05.01 19:43

차를 타고 산하를 누비다 보면 도로가 2중 3중으로 나있는 곳이 많다. 심지어 어떤 곳은 지방도, 국도, 신국도, 고속도로가 한 장소에 몰려 있어 눈앞의 풍경이 온통 도로로 가득 차 있는 경우도 있다. 물론 도로를 만든 사람들이야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를 들이대겠지만,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도로 저편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남의 나라나 다름이 없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이웃을 마치 외국 대하듯이 살아야 하는 이 기막힌 현실!

민중의 애환이 서린 진도아리랑의 가사를 보면 “쓸만한 밭뙈기 신작로 되고요 쓸만한 사람은 가막소 간다”는 구절이 나온다. 일제의 수탈과 탄압의 역사를 이보다 더 간명하고 알기 쉽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이 나라에 최초로 들어선 신작로가 1908년 개통된 전주-군산간 도로이다.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공출하기 위해서다. 이미 한일합방 이전에 일제는 식민지 수탈의 도구로 도로건설에 착수했던 것이다.

신작로의 출현은 전통적인 우리 농촌의 모습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먼저 마을 공간이 지동차 도로에 의해 양분됨으로써 마을과 마을, 마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가 단절되고 만 것이다. 이는 ‘분리와 지배’(divide & rule)라는 제국주의 지배의 기본원칙과도 일치한다. 다음에 신작로를 통해 농촌의 부와 인재가 끊임없이 도시로 해외로 유출된 점이다. 반면에 도시와 해외에서 만든 공산품들이 신작로를 통해 농촌으로 유입됨으로써 외부에 의존하는 농촌경제구조를 고착시킨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동차를 타고 놀러온 도시인들을 보고 농민들은 상대적 박탈감과 함께 도시문화에 대한 동경심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땅의 농민들 가운데 아들딸에게 가업을 물려주겠다고 하는 이가 거의 없다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신작로의 출현으로 시작된 농촌의 붕괴는 현대로 올수록 가속화해 이제는 농촌이 도시민을 위한 위탁영농단지 내지는 관광휴양지로 전락하고 만 느낌이다. 사정이 이럼에도 오늘날 마을 앞에 시원스레 뚫린 고속도로를 보고 일제시대의 신작로를 떠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아마도 농민들마저 ‘선진조국을 앞당기는 고속도로’ 신화에 도취된 모양이다.

국정운영의 담당자들 머릿속엔 도로의 길이가 길고 도로가 많이 건설될수록 선진국이라는 믿음이 굳게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아니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거의 신앙의 경지에까지 이르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전국에 걸쳐서 저런 무지막지한 국토파괴에 나설 수 있는지 설명할 도리가 없다.

대한민국의 국토건설의 기본방향은 이미 박통 시절에 완성된 것이다. 그 사이 부분적인 수정은 있었겠지만 기본적인 개념에 있어서 거의 변화가 없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이루어진 건설과정이 말해 준다. 당시에 국토건설의 핵심 정책 입안자였던 자의 구상에 따르면, 인구과밀 국가인 대한민국이 선진국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나라 전체를 싱가포르와 같은 효율적인 도시국가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도시를 집중적으로 키우면서 도시와 도시 사이를 고속(화)도로로 촘촘히 얽어매는 것이 관건이라고 한다.

이 구상 어디에도 농촌이 들어설 공간은 없다. 까놓고 얘기하면 이 구상은 농촌의 소멸을 기정사실로 하고 만들어진 것이다. 무섭고도 몸서리쳐진다.

현 정권이 이런 정도로 극단적인 국토건설 구상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싶지는 않지만, 농촌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자꾸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둘 중의 하나가 잘못된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일찍이 일제는 중국의 거점도시 몇몇을 차지하고 그것을 선으로 연결하여 전중국을 점령한 듯이 호들갑을 떨었으나 결국 농촌의 반격에 의해 패퇴하고만 쓰라린 기억을 가지고 있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망으로써 국토건설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는 무리들은 이 교훈을 잘 새겨야 할 것이다.

황대권/ 생태공동체운동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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