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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01 19:55 수정 : 2005.05.01 19:55

보다시피 나는 남자다.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널 낳고 자랑스러움에 가슴이 뻐근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자랑스러움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건 ‘여성학’을 수강한 대학 졸업반 때부터였다. 1960년대 내 어머니의 자랑스러움은 체제의 국외자로 전락하지 않은 데서 오는 깊은 안도감에 닿아 있었다. 어머니로서의 자랑스러움이기 전에, 며느리와 아내로서의 자랑스러움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이런 출생의 시대변수 탓에 나는 사회적 성(젠더)으로도 남성이다. 집과 학교,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남성주의를 갈고 닦은 몸이다. 그렇게 체화한 이데올로기가 한 학기 교양과목 배운 걸로 온전히 ‘전향’될 리 없다. ‘양성평등’ 하면 정치적으로 올바른 한마디를 거들지만, <문화일보> 연재소설 ‘강안남자’를 대할 땐 삽화부터 보고 본문을 읽을지 말지 결정한다. 물론 삽화가 선정적일 때만 읽는다. 이 소설이 마초적이라는 문제의식은 그 순간 꺼림칙한 느낌 정도로 스칠 따름이다.

얼마 전 한나라당이 성폭행범에게 위성위치확인장치가 달린 전자팔찌를 채우는 법안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예상대로였다. 전자팔찌가 품고 있는 발화성은 곧바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찬성도 반대도 논거는 명쾌했다. 찬성의 논거는 세계 2위의 성범죄 발생 빈도와 80%대에 이르는 재범률이라는 현실에 바탕하고 있었다. 반대의 논거에는 이중처벌금지와 죄형법정주의 따위의 법리에다 가해자의 인권이라는 수준높은 인권 감수성이 보태졌다.

하지만 예상을 빗나간 것도 있었다. 나는 논쟁의 담론이 날선 대립각보다는, 각자 결론에 이르는 과정과 상호 공감을 거쳐 훨씬 넓어지고 풍부해질 거라고 기대했다. 전자팔찌는 한갓 시비의 대상을 넘어선다. 이 낯선 발명품은 한국사회 ‘여성’과 ‘인권’의 현주소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찬반 양쪽의 교감대는 무척 협소해 보인다. ‘팔찌=거울’이라는 인식조차 형성되지 못한 듯하다.

지난 한 해 신고된 성범죄는 1만4154건에 이른다. 실제 발생건수는 신고건수의 10배 안팎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성범죄 피해 여성의 인권은 평생을 두고 유린당한다고 전해들었다.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 22명을 살해한, 영화 <밴디트 퀸>의 실존인물 폴란 데비 얘기를 들으면 그제서야 실감난다. 그 여성이 한국사회에 출현한다면 나부터 보험드는 셈치고 용산전자상가를 뒤져 전자팔찌를 사겠다.

가해자의 인권 역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살인의 추억>의 송강호 같은 형사가 많은데도 대한민국 치안은 아직 세계적 수준이다. 온국민의 주민등록번호와 10지문을 국가가 관리하고 있는 ‘덕분’이다. 이 두 제도는 온국민이 잠재적 범죄자라는 전제에 기반한다. 법없이 살 사람도 가해자 인권 문제에 신경써야 하는 사정이 거기에 있다. 국가가 나를 잠재적 성폭행범으로 본다면 ‘강안남자’를 읽을 때보다 더 꺼림칙해야 옳다. 전자팔찌는 나쁜데 주민등록번호와 10지문이 좋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전자팔찌를 둘러싼 논란의 담론이 넓고 풍부해야 하는 까닭은 온국민의 주민등록번호와 10지문을 국가가 관리하는데도 유독 성범죄 발생 빈도가 세계 2위라는 데 있지 않을까. 전자팔찌 입법안이 발표된 뒤 여성단체들의 고민이 유별나게 깊었다고 들었다. 그들은 어느 한쪽을 쉽게 편들지 못했다. 나는 그들의 깊은 고민이 ‘여성’으로서 ‘진보’를 고민하고 실천하기에 떠안은 시대의 무게라고 느낀다. 그래서 여성단체들의 고민 자체에 깊은 존경심이 든다.

전자팔찌 논란 덕분에 한국사회가 전자팔찌 없이도 여성들이 불안해하지 않는 세상을 향해 한걸음 더 나아갔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성범죄와 여성 문제를 바라보는 수사당국과 사법당국의 시각부터 달라져야 한다. 이 논란으로, 이 시대 가임여성들은 아들을 낳든 딸을 낳든 온전히 출산의 기쁨만으로 자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덤으로, 나같은 얼치기의 성인지와 인권 감수성도 조금은 더 깊어졌으면 좋겠다. 전자팔찌 논란 하나로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는 건가.


안영춘/ 온라인담당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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