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5.01 22:08 수정 : 2005.05.01 22:08

복구 한마음 ‘민족화해 상징’

"용천요? 경의선 열차를 차고 갈때마다 정말 놀랍게 변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4월29일 용천에 인접한 신의주시에서 만난 회사원 정영주씨는 용천 하면 커다란 변화가 생각난다고 밝힌다. 정씨뿐 아니라 다른 북한 사람들에게도 용천은 변화와 민족 화해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평양에서 신의주에 출장온 리기재 농업성 감자처장도 신의주까지 오는 국도에 자리잡은 용천을 지나면서 "용천 복구를 위해 애쓴 북한 사람들의 애정을 새삼 떠올렸다"고 말한다. 리 처장은 "용천 사고가 났을 때 전국 각지에서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조차 긴급 구호품을 내놓았다"며 "긴급구호 활동이 끝난 뒤에는 자원해 용천 건설현장을 찾은 사람들도 많았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한마디로 북한의 전 주민이 한마음이 돼 용천 복구에 나섰다는 것이다. 하지만 리 처장은 "북한 주민들이 용천 사고를 계기로 남한 사람들이 우리 민족임을 새삼 느겼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지난해부터 용천 복구를 진두지휘한 장송근 용천복구지휘부 뷔원장도 "용천 복구 과정에서 남쪽 동포들이 참 성의가 있다는 생각을 줄곧 했다"며 "용천은 남북이 힘을 합쳐 성공적으로 북구한 21세기 민족화해 상징물"이라고 말했다.

방문단의 일원인 송월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는 "용천은 북한뿐 아니라 남한 내 화해에도 도움을 주었다"며 "지난해 용천 돕기운동은 이념적 성향을 떠나 남한의 모든 국민이 동참한 분단 이후 최초의 사례"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용천 아직도 손 못댄 곳 많아
복구율 80%...지속전 관심을


“1년 만에 80%를 복구한 것은 정말 빠른 복구실적입니다.”

채규정 전북 익산시장은 용천의 복구 진척 정도를 듣고 그 속도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채 시장은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 당시 사고 1년 뒤 임시 복구를 하고, 2년이 지났을 때에야 완전복구를 했다”며 “그 때와 비교해도 결코 늦지 않다”고 평가했다.

장송근 용천복구지휘부 부위원장은 그러나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는 반응이다. 남북한 전 국민의 관심 속에 진행한 ‘80%의 길’보다, 관심이 식은 듯 보이는 지금부터 가야 할 ‘20%의 길’이 더욱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용천시복구지휘부는 시 인민들의 생활안정에 복구의 최우선 순위를 두었으며, 이에 2000세대 살림집, 용천역, 소학교 등이 새로 건립 완료됐다고 밝힌다. 하지만 복구지휘부는 “아직 손을 못대고 있는 곳 또한 많은 상태”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전남 교육청이 지원한 유치원은 외형만 완성된 채 내부 시설을 못하고 있는 단계이고, 익산시가 지원한 탁아소는 뼈대만 올라간 상태다.

또 군내 도로는 상당부분 아스팔트 포장이 되지 않았고, 상하수도 시설과 가로등도 갖추지 못했다. 소학교 교육자재는 갖춰졌지만, 학교급식용 ‘두유 운반 차량’ 등 아직도 미진한 부분이 있고, 용천중학교 등 다른 교육기관의 책걸상·칠판 등 교육자재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박영희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해외동포 영접처장은 “평북 인민위원회에서는 이른 시일 안에 남은 20% 복구를 끝마쳐 용천을 21세기 대표적 관광지로 발전시키자고 결의했다”며 “이런 인민위원회의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걸어온 ‘80%의 길’과 마찬가지로 남북의 용천 사랑이 다시 힘을 합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용선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사무총장은 “이번 용천 방문 때 아스팔트 2000t과 씨감자 500t을 지원했다”며 “앞으로도 용천복구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겠다”고 밝혔다.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