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05 20:16
수정 : 2005.05.0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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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길 사회부 행정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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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풍수라는 말이 있다. 얼치기 풍수쟁이라는 뜻이다. “반풍수 집안 망친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일을 그르치는 얼치기를 말한다. 반풍쟁이라는 말도 있다. 중풍이 어중간하게 와서 정상생활도 못하고 완전히 드러누울 수도 없는 중풍환자를 일컫는 말이다.
이른바 386 세대라는 이들이 요즘 사회에서 반풍수 취급을 받으며, 반풍쟁이 처지에 있다. ‘국정경험 없는 386 운동권에 의해 장악된 노무현 정부’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어이없는 얘기다.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한국 사회가 과거처럼 5·16 군사 쿠데타의 주체들이나, 12·12 군부 쿠데타의 신군부같이 소수 특정집단에 의해 장악될 수 있다고 보는 모양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현 정부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집단을 굳이 따지자면 삼성과 관료들이다. 최근 고려대 학생들이 이건희 삼성 회장의 명예박사 수여식을 저지하자 난리가 났다. 고려대에서는 보직교수들이 총사퇴하고, 학생들을 징계한다고 법석을 떨고, 일부 신문들은 삼성이 고려대 쪽에 줬다는 기부금을 들먹이며 ‘400억원도 모자라냐’라는 민망스런 제목까지 뽑았다. 나는 우리나라의 존경받는 국부가 조폭들에게 테러당한 줄 알았다. 노무현 정부가 중반을 지나며 개혁적 인사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물러가고 관료 일색으로 그 자리들이 메워지고 있다.
그럼 권력 주변에 있는 386들은 뭐냐고 물을 수 있다. 아마 청와대 비서관과 행정관 등 정부내의 실무 정무직과 국회에 진출한 386 운동권 출신들을 말하는 모양이다. 청와대가 돈과 절대권력을 놓은 상황에서 그들이 정부에서 얼마나 영향력을 쓸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 그들은 그 자리에 386 세대 운동권으로서가 아니라, 여의도 정치판 출신으로 갔다. 정치판에 들어가 선거에 이겨서 정무직에 나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386 세대의 80년대 초반 학번들도 이제 40대다. 486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정치판에 들어간 386들이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 정무직 공무원이나 국회의원이 된 것처럼, 다른 386들도 40대라는 나이에 걸맞게 우리 사회 곳곳으로 나갔다. 옛날에는 총 몇 방 쏘고 정권 잡았지만, 이제는 대학시절 돌과 화염병 몇 번 던졌다고 감투쓸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가 녹록지 않다.
‘아, 옛날이여!’ 하며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386 운동권이 정부를 장악했다는 말을 주로 한다. ‘빨갱이들이, 좌파들이 사회를 장악했다’는 식의 이념공세가 잘 통하지 않자, 특정 세대에게 책임을 물으며 둘러대는 것이다. 그렇다고 386 세대들이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있을 만한 것도 없다. 얼마 전 최장집 고려대 교수가 386 세대들이 한국사회의 중추가 됐는데 비전이 없고 준비가 안 됐다고 질타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도 <한겨레 21>에서 ‘너무 일찍 철이 들었고’ ‘전사의 시대를 살다 피기도 전에 일찍 시들어 버렸다’며 “당신들의 책임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물었다. 선의와 애정에서 나온 구구절절 뼈에 사무치는 얘기다. 그러나 이제 우리 사회의 성숙과 진보의 몫을 386 세대 어깨에만 다시 놓을 수는 없다.
따지고 보면 386 운동권 세대들은 불행한 이들이다. 80년대의 무거운 시대과제가 당시 어린 그들에게 지워졌다. 80년대라는 거친 세월의 강을 무사히 건넌 사람도 있지만, 그 짐을 못이겨 무너져버린 사람도 적지 않다. 운동이란 열병에 정신없이 헤매다가 어느날 고개를 들어보니 세상은 변했고, 자신이 설자리는 없는 반풍쟁이들 말이다. 요즘 386 운동권 세대를 비난하며 ‘뉴라이트’라고 나서는 친구들도 따지고 보면 그런 안타까운 반풍쟁이들이다.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끼는’ 80년대를 건너온 386 세대건만, ‘동지도 간데없고 깃발마저 찢어진’ 신자유주의의 거센 풍랑 앞에 놓여 있다. 그 책임을 또 그들에게만 묻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동지도 다시 모으고, 깃발도 다시 세우는 것은 이제 우리 사회 모든 세대의 몫이다.
정의길/사회부 행정팀장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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