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05 20:33
수정 : 2005.05.05 20:33
매년 5월이 되면 프랑스 작은 도시 칸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58회를 맞는 칸영화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최고의 영화축제이고 가슴 설레게 하는 스타와 기대작으로 넘쳐나는 문화의 향연이다.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영화를 발굴하고 소개해야 할 영화제가 대자본의 공습에 휘둘린다는 비판이 있긴 했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세계의 언론과 영화인들은 칸을 찾아 축제를 만끽하고 기사를 타전할 것이다. 지난해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맛본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칸영화제가 열리기 직전, 또 하나의 중요한 문화계의 행사가 프랑스와 국경을 마주한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다. 5월 9일부터 사흘간 열리는 국제문화전문가단체(CCD) 제4차 총회가 그것이다. 1998년 캐나다 퀘벡에서 첫 걸음을 뗀 국제문화전문가단체는 세계 90여개국 600여 문화단체가 소속된 연대회의로, 문화예술을 자유무역의 대상으로 거래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상품으로서의 경쟁력을 갖지 못한 소수 문화를 보존하고 세계 문화다양성을 증진시키자는 목적으로 결성된 기구이다.
이번 마드리드 총회는 21세기 세계 각국이 벌이는 문화를 둘러싼 공방의 미래를 가늠케 하는 중요한 회의이다. 특히 오는 10월 ‘문화 콘텐츠와 예술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를 위한 협약’의 채택을 결정하는 유네스코 제33차 총회를 앞두고, 각국 정부의 최종적인 의견을 종합하여 협약 초안을 마무리하는 제3차 정부간 회의가 5월말 열릴 예정인데, 각 정부의 의견 조율에 전세계 문화인들의 견해가 결정적인 몫을 한다는 점에서 이번 총회의 중요성이 한층 커진다. 현재 국제사회는 협약의 국제법적 지위와 관련하여 강제적 구속력을 강화하자는 대다수의 의견과 권고 수준에 그치게 하자는 미국을 비롯한 몇 나라의 의견으로 극명하게 나뉘어 있다.
국제무역기구(WTO) 체제 아래 급속도로 진행 중인 자유무역협정(FTA) 등의 통상협정은 방송쿼터제, 가요쿼터제, 스크린쿼터제 등 시청각문화에 대한 정부의 지원정책뿐 아니라, 전통음악, 미술, 공연 등 열악한 문화 부문을 지원하는 정부 보조금, 인센티브 등의 문화정책을 비관세장벽으로 규정하려 하고 있다.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문화상품도 예외 없이 비교우위의 논리에 입각해 취급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상품 가치를 지니지 못한 문화는 아무런 대책 없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세계 문화라는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구성하는 소수의 문화, 그들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이, 강력한 상품 가치를 지닌 제국의 문화에 의해 획일화될 위험에 놓인 것이다.
노벨 문학 수상자 등의 문화계 인사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사무총장과 스페인 부총리, 브라질 문화부장관 등 정부와 국제기구 대표들이 대거 참가하는 이번 총회의 핵심은 주권국가의 문화정책 수립의 자주권을 국제법으로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인류사회는 생태계의 종 다양성에 버금가는 문화 다양성을 보존하고 공존의 길을 모색할 것인가, 문화제국의 횡포에 약자의 문화가 사라지는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을 것인가의 기로에 서있기 때문이다.
아쉬운 것은 우리 언론 어느 곳도 이렇게 중요한 마드리드 회의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칸영화제의 이상이 다양한 영화를 발굴하여 풍부한 영화적 토양을 다지는 데 있다면, 이번 마드리드 총회야말로 그러한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토대를 다지는 작업이다. 스타들로 넘쳐나는 화려한 축제는 아니지만 전세계 문화계가 주목하는 마드리드가 우리 언론의 무관심으로 칸의 화려함 뒤에 묻혀 잊혀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정지영/ 영화감독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