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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08 17:34 수정 : 2005.05.08 17:34

요즘은 거의 한 달이 멀다 하고 “식민지 때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많았다”는 식의 발언이 여론을 어수선하게 만든다. 오늘의 미국과 어제의 일본을 ‘은인’으로 보는 시각은 제국주의가 키워낸 한국 지배층의 변함없는 효심(?)이지만, 이 속뜻을 요즘만큼 노골적으로 전파시키는 시기는 별로 없었던 듯했다. 과연 이와 같은 일이 어떻게 가능하게 됐을까? 일부 지배계급이 그 매판적 본질을 노골화시키는 동기가 무엇일까?

식민지 근대화론의 공세가 가능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민족주의적 ‘수탈론’의 학문적 미약함 때문이다. 서구중심주의 위주의 일본식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수탈론자’들은, 봉건시기 말기에 자본주의 맹아가 생긴다는 서구·일본식의 역사 서술을 한국사에 맞추느라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공장제 수공업’을 조선 말기 현실로 묘사했는가 하면, 19세기의 ‘신분제 동요’나 일제의 토지조사 때의 ‘토지 수탈’에 대한 과장되고 부정확한 서술로 많은 국내외 학자의 불신을 샀다. 서구적 근대와는 거리가 먼 위기 속의 농업관료국가인 조선을 근대국가 일본이 점령하여 조선 민중에 대한 비인간적 수탈을 일차적으로 자본주의적 금전 거래 위주로 했다는 사실을 말하면 자존심이 그렇게 상하는가? 조선 말의 쇠약한 모습과 일제 수탈의 근본적인 자본주의적 성격을 모두 인지하는 객관적 정리가 없다면 우리는 식민지 근대론에 완패를 당하고 만다.

그런데 요즘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일제에 ‘보은’하려는 모습을 스스럼없이 내비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일제 때의 경제·사회가 많은 면에서 오늘날 신자유주의를 예시했기 때문인 것 같다. 만주 침략이 본격화된 1931년부터 일본 대자본이 조선으로 진출하여 조선내 투자자본의 90%를 차지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조선 자본가들이 열심히 만주 등으로의 진출을 노렸다. 조선 재계에서는 ‘만주붐’이 일어났고 〈동아일보〉도 “평양 양말, 옥양목, 면포, 고무신의 만주 대진출”을 예찬했다. 일본 대자본을 다국적 기업으로, 만주를 중국 등 아시아 시장으로 대체시키면 본토에서 외국자본의 공격으로부터 잘 방어하지 못해도 세계 주변부들의 노동력과 시장으로 재미를 볼 수 있는, 오늘날 한국의 부르주아들의 준(準)주변부적 상황이 예시된 것이 아닌가? 노동자·소작농들의 고용 불안, 사회 양극화의 양상과 기득권층의 부 독점의 심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식민지의 야만적 착취를 ‘개발’로 부르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신자유주의적 야만을 당연하고도 긍정적으로 보는 근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감정으로 맞서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대신에 그들이 찬양하는 시장의 먹이사슬이 그때나 지금이나 얼마나 인간을 황폐화시키는지를 보여주고 자본주의적 야만에 대한 사회주의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만 식민지 방식이든 신자유주의적 준주변부 방식이든 ‘개발’이라는 이름의 환상이 청산될 것이다.


1월 17일치 〈한겨레〉에 실린 졸고 ‘반한단체? 출입국관리사무소’가 저자의 불충분한 판단과 부적절한 표현 사용으로 인하여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의 명예감정을 손상시킬 만한 여지를 내포했음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필자는 해당 사무소 직원 분들에 대한 어떤 악의적 감정도 없었으며, 위의 제목과 같은 수사적 표현들을 해당 사무소 직원분들의 명예감정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쓴 주관적 의도가, 어려운 처지에서 온갖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는 아시아, 아프리카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조금이나마 나은 생활을 할 수 있게끔 누구보다도 그들을 상대로 하는 공권력을 가진 분들께서 역지사지의 지혜를 발휘하여 친절을 베풀어 주셨으면 하는 필자의 바람이었음을 해명드리고 싶습니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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