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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10 19:35 수정 : 2005.05.10 19:35

지하철은 나의 발이다. 또한 세상을 보는 나의 창이다.

나는 출퇴근 시간을 포함해 거의 매일 두 시간 정도를 지하철 안에서 보낸다.

내가 이용하는 지하철은 5호선이다. 방화와 상일동(마천)을 종점으로 하고 왕십리-마포-목동을 지나는 5호선은, 여러모로 살펴볼 때 ‘서울특별시 보통 시민’이 타고 다니는 노선이 아닌가 생각한다. 강남의 부자 마을을 지나가는 3호선도 아니고, 고달픈 삶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1호선과도 분위기가 약간 다르다.

다른 노선도 마찬가지겠지만, 5호선을 타고 다니다 보면 똑같은 얼굴의 잡상인들을 만난다. 요즘 부쩍 자주 만나는 상인은 건강 서적을 파는 늙수그레한 할아버지다. 그는 서울시장과 이름이 똑같은 사람이 지었다는 암 예방 책자를 손 위에 가득 올려놓고 다니면서 ‘세일’을 한다. 한 칸을 왔다갔다하는 사이에 금세 빈손이 돼 있는 것을 보면, 책이 꽤 잘 팔리는 모양이다. 책값이 종잇값도 안 돼 보이는 1000원에 불과한 점이 승객에게 큰 매력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싸다는 이유만으로 지하철을 애용하는 ‘짠돌이’ 시민의 지갑을 손쉽게 열지는 못할 것이다.

궁금해서, 그가 어떻게 책을 선전하는지 유심히 지켜봤다.

“서울대 의학박사 출신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신림동에서 이아무개 박사가 운영했던 병원에는 환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몇 시간을 기다려도 만나기도 어려웠답니다. 그 비법이 단돈 천 원의 이 책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옳거니, 저것이 열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팍팍한 도시생활 속에서 망가진 건강,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지만 서울대 박사라는 권위, 싼 가격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잘 비벼 놓은 상술의 승리였다. 거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그의 수더분하고 넉넉한 인상이 믿음을 준다는 것이다.

나는 이 풍경 속에서 보통 시민이 일상적으로 겪는 몇 가지 고단한 삶을 발견한다. 하나는 서민들이 1000원짜리 정체불명의 책자에 혹할 만큼 건강에 위협을 느끼고 있고, 또한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서울대 출신이라는 사람이 책을 썼다는 것을 내세우는 것만으로도 꼬빡 죽는 학력 지상주의가 서민들의 마음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마침 올해 건강보험은 1조5천억원 정도의 흑자가 예상된다고 한다. 보건복지부는 이 가운데 7천억원을 자기공명 영상촬영(MRI), 분만비 지원 등에 쓰기로 한 데 이어, 최근에는 6천억~7천억원을 암, 심장기형, 뇌질환 등 중증에다 돈이 많이 드는 환자의 부담을 더는 데 투입하기로 했다. 여기에 2004년도 정산분 5천억원까지 더 생길 것이라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 지하철 체감지수로 판단하건대, 아직 쓰임새가 정해지지 않은 돈은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걸리는 암 치료비를 덜어주는 데 집중적으로 썼으면 좋겠다.

학력 지상주의와 줄세우기 교육은 팍팍한 도시생활에 지친 서민의 삶을 더욱 고단하게 만드는 주범의 하나다. 재벌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왜 우리가 아이들의 교육 때문에 빈민생활을 해야 하느냐?”고 넋두리를 해댈 정도이니 말이다. 큰부자가 아닌 다음에야 아이들의 사교육비를 대느라 허리가 휘어지고, 변변한 문화생활도 할 수 없는 게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굳이 ‘고1 반란’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지하철 5호선의 풍경은 학력주의와 줄세우기 교육의 폐해를 잘 보여준다.

요즘 여야 정치권이 입만 열면 하는 얘기가 ‘대결 정치에서 생활 정치로’다. 생활 정치의 요체는 보통 시민이 병원 다니는 데 부담을 가지지 않고, 교육하는 데 스트레스 받지 않는 것이 아닐까?

정치인들은 선거 때만 되면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서민들과 친한 척을 한다. 제발 평소에도 가끔은 지하철을 타면서 서민들의 고단한 모습을 살펴보기 바란다. 새로운 시대의 생활 정치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정치인의 지하철 타기와 버스 타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오태규 사회부장 o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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