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11 19:29
수정 : 2005.05.11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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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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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2002년 4월1일 취임식에서 “지금까지 경제정책의 초점이 ‘경기부양’에 맞춰졌다면 이제는 ‘안정’에 더 힘을 쏟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중앙은행과 금융통화위원회 수장으로서 펴온 통화정책은 안정과 거리가 멀었다.
금통위는 매달 회의를 열어 콜금리 목표를 정하는데, 박 총재 취임 이후 37개월 동안 실제로 콜금리를 조정한 것은 다섯 차례였다. 취임 초인 2002년 5월에 한차례 0.25%포인트 올린 뒤, 2003년 5월, 7월, 2004년 8월, 11월 네 차례는 0.25%포인트씩 내리기만 했다. 통화 정책만 보면 우리 경제는 계속 디플레이션 상태였거나 그런 우려가 컸던 때처럼 보인다. 그러나 2002년에는 경제성장률이 7%에 이르러 과열이 걱정될 정도였다. 2003년 이후론 경기가 침체에 접어들긴 했지만 아파트 등 부동산값이 치솟으며 자산 거품이 커져가는 모습이다. 금리를 올려야 할 상황에서는 움직이지 않았고, 넘치는 부동자금으로 자산 거품 우려가 제기됐음에도 지속적으로 금리를 내려온 탓이 크다. 국제결제은행은 “중앙은행이 자산 거품을 막기 위해 선제적 조처를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고, 박 총재도 “자산가격 안정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한 바 있지만, 통화정책에 투영된 것은 딴판이었다.
과정을 봐도 박 총재의 말과 정책은 종잡기 어려웠다. 취임 후 첫 금통위가 열린 2002년 4월에는 경기가 좋았다. 그는 “금리 인상으로 경기의 발목을 잡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달인 5월에 금리를 올렸다. 금리를 올려야 할 상황이었던 것은 맞다 해도, 허를 찔린 시장의 평가는 냉소적이었다. 경제관료들이 콜금리 유지를 시사한 데 대해 일종의 ‘몽니’를 부렸다는 게 많은 시장 관계자들의 관측이었다.
이후 1년은 ‘움직이지 않은’ 기간이었다. 적지 않은 경제 전문가들이 부동산 거품을 걱정하며 금리를 올려야 한다고 했고, 박 총재 자신도 2002년 8월 한 강연에서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는 상황에서는 물가가 3% 이내로 안정돼도 진정한 안정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하는 등 여러 차례 금리 인상 가능성을 내비쳤지만 콜금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유도 갖가지였다. 그해 10월에는 일부 금통위원들이 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주장을 폈지만, 주식시장 여건이 좋지 않다며 금리 동결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금리 인상 시기를 놓치고 2003년 5월부터는 금리 인하로 돌아선다. 그 앞 달 국회 업무보고에서 박 총재는 “인위적 경기 부양은 부작용이 따른다”고 했지만, 한 달 사이에 바뀐 것이다. 7월에도 금리를 내렸다. 수도권 아파트값은 그해 10월 10·29 부동산 대책이 나올 때까지 급등세를 탔다. 연이은 금리 인하 탓이라는 지적이 일자 그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저금리도 한 원인이지만 중심 요인은 교육”이라며 발을 뺐다. 2004년 들어 5월에 “경기가 본격적으로 회복단계에 들어서고 물가 위험이 가시화할 때 금리 인상을 검토하겠다”며 인상 쪽에 무게를 뒀다가 8월에 금리를 내렸다. 10월에는 “8월 콜금리 인하로 시장 유동성이 충분하고 금리도 사상 최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지만 자금 수요가 없다”고 해놓고, 11월에 금리를 낮췄다. 임태희 한나라당 의원은 그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박 총재의 이런 모습을 두고 ‘혼란스러운 나침반’이라고 꼬집었다.
박 총재는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미국의 연이은 금리 인상으로 우리와 금리 역전을 코앞에 두고 있다. 부동산 시장 불안은 여전하고 4월 생활물가가 전년 같은 달보다 4.9%나 오를 정도로 물가 상황도 만만찮다. 박 총재는 1989년 건설부 장관 때 아파트 분양값 자율화를 주장하다 집값 폭등을 부추긴다는 여론의 질타를 받고 낙마한 적이 있다. 한은 총재로 있으면서도 부동산 거품을 키웠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부는 경기 부양에 무게를 두기 마련인데, 중앙은행마저 안정을 소홀히하면 재정 정책과 통화 정책 사이 견제와 균형은 기대하기 어렵다. 1년 남짓 남은 임기 동안 그의 말과 행보가 주목된다.
김병수 논설위원
byung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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