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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12 20:09 수정 : 2005.05.12 20:09

국제정치학 용어 중에 ‘거울 이미지’(mirror image)라는 개념이 있다. 냉전 초기의 미국-소련 관계와 같이 급속히 대립이 격화될 때 자주 나타나는 현상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이다. 정확히 정의하기가 다소 어렵지만, ‘상대국(적대국)이 자국을 보는 것과 같은 시각으로 상대국을 바라보는 경향’이라 요약할 수 있다. 대립이 격화되는 적대 관계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개념이다. 적대 관계에 있는 국가들이 결과적으로 서로 유사한 인식 틀에서 상대방을 보고 대응하는 흥미로운 현상이 국제정치에서는 자주 나타난다. 거울 속의 상대방이 오른쪽으로 가는 것에 대항해서 왼쪽으로 기울수록 거울 속의 이미지도 더욱 오른쪽으로 쏠린다. 권총에 손을 대는 것도 자신과 거울 속의 상대방 어느 쪽이 먼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진행된다.

냉전 초기 미-소 관계에서 이런 현상이 전형적으로 보인 적이 있다. 1949년 말 소련의 원폭 개발과 중국 공산당 정권의 수립이라는 이중의 위기를 배경으로 미국은 소련에 대한 공세적 정책으로 전환하는 NSC68(국가안전보장회의 문서 68)을 작성했다. 이 문서에서 소련은 세계 지배를 꿈꾸는 장기적 계획 아래 일사불란하게 세계 각지에서 일관된 정책을 추진하는 거대한 음모집단으로 묘사되었다. 같은 대소 강경론이지만 소련의 대외정책을 내부적 불안과 갈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 케넌과는 달리 ‘한덩어리 음모집단’으로서의 소련 이미지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연구들에 의하면, 같은 무렵 소련도 미국에 대해 비슷한 분석을 진행하면서, 대항책으로 특히 극동 지역에서의 공세적 정책으로 전환해 갔다고 한다. 김일성의 거듭되는 남침 지원 요청에 소극적이던 스탈린이 1950년 1월 이를 최종적으로 ‘허가’한 것도 이런 흐름 속에서다.

지난 3월 이후 한-일, 중-일 간에 역사문제를 둘러싼 갈등 과정에서도 ‘거울 이미지’ 현상이 곳곳에서 보였다. 한·중·일의 논의가 어떤 면에서는 닮은꼴로 진행되는 느낌조차 받았다. 각기 상대방은 ‘한덩어리가 되어 일관된 계획 아래 움직이는 실체’이며, ‘전혀 변하지 않고 앞으로도 변화하지 않을 존재’로 그려진다. 일본의 우파 논객들은 ‘변하지 않는 중국’의 위협을 일본의 국가체제 정비 강화의 이유로 제시한다.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의 피해자인 한국과 중국이 지난 100년의 역사와의 ‘연속성’이라는 맥락에서 일본의 움직임을 인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한·중·일 간의 역사 문제는 과거를 둘러싼 대립이라기보다 미래의 방향성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핵심에 있다. 유사법제, 미-일 동맹 강화, 그리고 개헌(군사력 보유 공식화)을 추진하는 일본이 과연 어디로 향하는가 하는 장래에 대한 불안이다. 더군다나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과거와의 단절이 모호하고, 나아가 ‘연속’을 정치적으로 연출하는 일부 정치가들이 있기에 미래를 과거와 겹쳐볼 수밖에 없는 현실도 있다.

그러나 역시 지금은 100년 전과는 다르다. 우선 한국을 비롯한 여타 아시아의 객관적 역량과 국제적 위상도 전혀 다르다. 일본의 사회 경제 구조도 과거의 군국주의나 제국주의의 길로 쉽게 역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일본이 나아갈 길을 놓고 일본 자신도 방황하고 있다. 지금의 우경화 풍조는 일본의 일관된 전략의 산물이라기보다 전략의 부재로 인한 좌충우돌이라고 보아야 한다.

문제는 특정한 이해관계와 낡은 가치관에 입각해서 일본을 크게 오른쪽으로 기울게 하는 일부 세력들에 있다. 또한 이들이 정계의 상층부에 다수 포진하고 있는 것이 우리와 아시아의 고민이다. 일반 여론보다 정치 지도자가 기형적으로 오른쪽으로 편향된 것이 지금 일본의 모습이다. 최근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일반 여론은 정치권보다는 역사 문제의 존재와 중요성에 대해 훨씬 균형잡힌 반응을 보였다. 고이즈미의 돌출 외교와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한 불안도 적지 않다. 동아시아 공동체 틀 안에 일본을 끌어들이는 다면적 외교 전략이 요청된다.

이종원/ 일본 릿쿄대학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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