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5.16 18:13 수정 : 2005.05.16 18:13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 파동에서 고려대가 보여준 일련의 반응들은 기묘하다. 삼성 구조본의 고위관계자조차 일종의 해프닝으로 간주한 사태에 대해서 학교 당국은 보직 교수 사퇴서 제출과 반려, 시위 학생 처벌 검토 등의 블랙 코미디성 대응으로 일관한다. ‘회장님의 거듭된 겸양에도 불구하고 고려대가 굳이 고집하여 성사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학위 저지 소동에 대한 학교당국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반응들이 고려대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전방위적 영역에서 나타났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학교당국, 정부, 재계, 언론의 호들갑 속에서 단순한 해프닝이 ‘불경스런 행위’로 커나간 근원적인 이유는 이건희 회장으로 상징되는, 삼성의 ‘초현실적 권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초현실적 권위는 전체주의 국가나 결집력이 강한 종교집단의 지도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한 사람 안에 통합되지 않은 양극단의 모습이 공존할 때 얻게 되는 권위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환경도 제공하고 자신에게 헌신적이기까지 한 아버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수시로 책가방을 뒤지고 일기장을 들춰 보는 것을 알았을 때 아이는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과 동시에 설명하기 어려운 두려움을 갖는다. 헌신적이기만 하거나 일방적으로 폭력적이기만 한 아버지보다 이런 아버지가 병적인 권위 쪽이긴 하나 더 힘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아이의 양가감정에서 오는 ‘모호한 두려움’때문이다.

맹도견 무료 분양, 제3세계 지뢰제거 활동 등 삼성이 벌이고 있는 사회봉사 활동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고 전지구적이다. 내부 구성원에 대한 대우나 배려도 대한민국 최고다. 그러나 동시에 무노조 경영과 오너 일가에 대한 봉건적 태도, 편법상속 논란 등은 최고의 객관적 시스템을 갖춘 삼성의 모습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원시적이고도 초현실적이다. 삼성의 초현실적 권위는 이건희 회장에 이르러 거의 신격화된 권위의 수준으로 내닫는다. 고려대 사태가 그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제 현실세계에서 삼성의 초현실적 권위는 마치 이건희 회장의 아우라를 삼성 직원 수십만명이 나누어 행사하는 것처럼 막강하다. 일상에서도 삼성 소속이라는 이유 하나로 사람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정도다. 내부 구성원의 관점에서는 삼성에 대한 외부인들의 비판이 억울할 수도 있다. 삼성이 이룬 놀랄 만한 경제적 성과와 사회적 활동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꼭 그런 식의 억울함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휴대폰 위치 추적을 통해 노조설립 노동자를 감시했다며 삼성 관계자들을 검찰에 고소한 김성환 삼성 일반노조 위원장은 지금 감옥에 있다. 검찰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삼성 관계자들에게 무혐의 결정을 내린 6일 후 법원이 김 위원장에게 명예훼손죄로 실형 10개월을 선고했기 때문이다. 그는 단식을 하며 ‘치외법권 지역 삼성왕국이 대한민국과는 별도로 존재한다’고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그 말이 법의 영역 어디에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밝힌다. 초월적 권위에 맞서는 사람은 그래서 아득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나는 이번 고대 사태를 통해 삼성이 ‘왜 잘나가는 우리 뒷다리를 자꾸 물고 늘어지느냐’는 볼멘 시각에서 벗어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된 자신들의 초현실적 권위를 성찰하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이 회장이 명예 철학박사 학위 수여 답사에서 밝힌 것처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성찰하는 철학적 지혜를 길러야’ 하기 때문이다. 분열의 양가적 이미지가 아닌 통합된 철학을 가지고 현실적 권위를 당당히 누리길 바란다. 초현실적 권위를 넘볼 필요도 없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삼성의 현실적 권위는 그 자체로도 차고 넘친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