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16 18:41
수정 : 2005.05.16 18:41
필자가 대학생이던 1970년대에는 시골에서 서울구경 오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가보고 싶어 하던 곳이 동물원과 식물원이 있던 창경원이었다. 또한 4월 말이면 많은 서울시민들이 창경원의 화려한 밤벚꽃놀이를 즐겼다. 그러던 창경원이 무려 73년의 치욕 끝에 1983년 창경궁으로 복원되었고, 그 소식에 밤벚꽃놀이에 데이트를 갈 만한 재주를 가지지 못했음을 부끄러워했던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졌었다. 조선반도에 동물원 하나 세울 만한 장소가 없어서 일제가 창경궁에 동물원을 세웠을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창경원의 동물이 과천으로 이사갈 때까지 창경원이란 이름 속에 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고 민족적인 존엄성을 훼손하기 위한 일제의 음모가 숨어 있었던 것을 나처럼 모르고 지냈을 것이다.
광릉숲 하면 많은 사람들은 크낙새가 살 수 있을 정도의 원시림이 있고 국립수목원이 있으며 우리나라 임업연구가 시작된 곳으로 생각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광릉숲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는 조선의 왕권을 튼튼히 한 조선조 제7대 세조대왕의 능림이라는 데 있다. 세조가 승하한 1468년부터 한일 합병이 이루어진 1910년까지 무려 450여년 동안 산불의 방지, 경작 및 매장의 금지, 땔감 및 풀 채취 금지를 통하여 광릉숲에는 울창한 원시림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한일 합병 직후 광릉숲은 창경궁과 같은 운명을 겪게 된다. 수백년 동안 나무 한그루 벨 수 없었던 광릉숲에서 일제는 보란 듯이 수십만 그루의 아름드리 천연고목을 베어내고 조림을 하여 신성시되던 능림을 임업시험림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광릉 부근과 소리봉과 죽엽산의 천연림 지역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조림지로 바뀌어 지금은 광릉숲의 반이 조림지로 덮여 있다. 100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조림과 관련된 연구를 할 장소가 과연 광릉숲밖에 없었을까?
창경궁은 20여년 전에 벌써 복원되었는데 광릉은 어떤가? 많은 사람들은 광릉숲을 우리나라 임업연구의 탄생지로 중요시하며 일부의 인사들은 광릉의 수목원을 영국의 큐식물원처럼 세계적인 규모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창경원이 우리나라 동물원의 효시이니까 창경원을 동물원으로 계속 유지시켜야 하고 동물 우리가 부족하면 인접한 창덕궁까지도 동물원 우리로 바꾸어야 한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광릉 경내에 소풍나온 유치원생의 재잘거림을 들으면서, 훌륭한 산림박물관과 하늘로 쭉쭉 뻗은 울창한 일본잎갈나무 및 튤립나무의 조림지를 보면서 우리는 사실 가슴아파해야 한다.
광릉숲을 1913년에 임업시험림으로 바꾼 것은 일제였다. 그러나 광릉숲 한복판에 산림박물관을 건설하고 국립수목원을 설립하여 광릉숲을 더 훼손한 것은 바로 우리 정부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면 일본에 역사교과서를 고치라고 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 일제 만행의 잔재를 깨닫고 고쳐나가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중의 하나로 광릉숲 전체를 100년 전의 신성한 울창한 천연림으로 복원시키기를 제안한다. 생태계 훼손과 자동차와 방문객의 소음 때문에 쫓겨난 크낙새가 대대손손 편안히 살아갈 수 있는 광릉숲이 100년 뒤에는 완전히 복원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조도순/ 가톨릭대학교 생명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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