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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18 20:04 수정 : 2005.05.18 20:04

김종휘/ 문화평론가 하자작업장학교 교사

요즘엔 두 눈을 감고도 가끔 문근영을 본다. 두 편의 영화와 다수의 CF를 통해 어느새 나의 뇌리에 저장돼 초기화면처럼 떠오르는 문근영. 나만은 아니겠지. ‘전 국민의 여동생’이라는 가공할 염원이 불러낸 소녀 아닌가. ‘남자는 누구나 좋아하고 여자는 아무도 싫어하지 않는’ 불멸의 소녀는 지금 이 시간 당신의 마음에도 어른거린다. 비교컨대 ‘섹시 소녀’ 효리와 ‘천재 소녀’ 보아는 명료한 편이다. 일면 소비하면서 일면 비판하기에 만만했던 소녀들. 이에 비해 문근영은 뭐랄까. ‘귀엽고 깜찍하고 이쁘고 상큼하고 소프트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고 솜사탕처럼 달콤한 우리 귀염둥이’다. 이런 과잉 헌사에도 ‘당연하지!’ 윙크 한번 해주면 그만인 소녀다. 대체 넌 누구냐?

아니지. 당돌한 질문은 삼가자. 대신 전 국민이 ‘문근영’ 하고 발음하는 순간 부여하는 모든 욕망의 까탈스러운 승화라고 부르자. 이를테면 누구보다 덜 거만하고 누구보다 덜 발칙하고 누구보다 덜 불량스럽고 누구보다 덜 어리석은, 대게는 2% 넘쳐서 질리는 연예인들과 달리 두루 섬세하게 약간의 결핍으로 최상의 신선도를 유지하는 소녀.

한편 내가 아는 소녀들은 어딜 봐도 문근영 ‘같지’ 않거니와 문근영 ‘스럽지’ 않다. 내 친구의 딸아이도, 거리의 여고생도, 저마다 간직할 추억의 그녀조차 딴판이다. 예쁘다 싶은데 종종 막말을 하고, 공부 좀 하면 센스가 없고, 친절하면 둔하고, 재주가 많으면 주책 맞고, 닮아 보여 살피면 미소가 꽝이다.

해서 문근영을 덜컥 ‘여동생’ 삼은 대한민국의 오빠와 언니들은 체면이고 뭐고 없다. ‘요부 효리’에 열광하면서 그녀가 버렸을 소소한 일상의 재미들로 효리를 까대고, ‘철인 보아’를 부러워하면서 그녀가 접었을 소박한 꿈들로 보아를 가엾이 여기던 알량한 시선은 오간 데 없다. 문근영 앞에선 그냥 ‘해탈’이다.

돌아보면 효리와 보아는 인간적이다. ‘초인이 되느라 잃는 것이 많았다’는 여운을 풍길 만큼은 고되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문근영은 보면 볼수록 탈 인간적이다. 고통 없이, 포기 없이, 애초부터 만인을 위해, 두루 2% 덜하게 개발된, 완벽한 모델. 시대를 풍미한 다양한 소녀상의 결함들을 제거한 완전무결 소녀.

나는 가끔 두 눈을 감고 문근영을 본 뒤에 일본의 혼다나 소니가 개발한 로봇의 모습을 본다. 두 개 이미지가 겹치는 환영. 귀엽게, 매끈하게, 놀랍게, 조금씩 모자라 친근하기 그지없는, 보채고 떼를 쓴들 전혀 부담 없는 애완 로봇. 게다가 선행과 어진 심성과 바람직한 생활 태도까지 입력된 소녀 로봇이라면.

문근영이 로봇의 실체를 드러내는 망상에 이르면 조금은 오싹해진다. 문근영은 그렇게 오직 내 염치없는 욕망에만 작동하는, 변색과 변질이란 없는, 무균질의 취향들만 골라 집대성한, 순수 결정체로 나를 투사한다. 내가 갖는 어떤 미련과 체념도 용납하지 않고 무화시키는 절대 생기의 허망.

나는 오늘도 수시로 비참해지고 번번이 욕심냈다 후회하며 울먹이다가 헤헤 웃고 산다. 당신인들 다를까. 단지 우리는 내 앞에 서 있는 한 소녀를 사랑하는 연습을 게을리 할 때마다 각자 마음 속에서 문근영을 불렀을 뿐이다. 하니 행여 내 여동생이, 조카가, 딸아이가 문근영이길 원한다면 흠 많은 그 소녀부터 충분히 느껴야 하리라.


아쉽지만 내 마음의 초기화면 문근영을 이젠 그만 지워야 할 것 같다. 문근영, 안녕!

김종휘/ 문화평론가 하자작업장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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