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22 17:32
수정 : 2005.05.22 17:32
부처님이 오신 오월 산사에는 온갖 색깔의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해 향기를 뿜어내고 무늬와 크기가 서로 다른 날개를 뽐내는 갖가지 꿀벌들도 이리저리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생명의 합창을 연호한다. 충남 아산에 위치한 우리 학교 주변의 크고 작은 산 속엔 작은 규모의 아름다운 산사들이 산재해 있다.
몇 년째 주말이면 한 시골 초등학교인 거산분교에 환경노래 특강을 다니고 있다. 기타를 치며 악동들과 함께 신나게 ‘노래하는 환경교실’ 한마당을 끝내고 교문을 나오면 땀을 시키기 위해 근처 봉곡사로 향한다. 신라 진성여왕시절에 지어진 이 산사에 가려면 700미터 정도의 아름다운 솔밭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200여 년 전 겨울 다산 정약용이 실학자 13명을 모아 성호이익의 문집을 정리하는 강학회를 열흘간 열었다는 봉곡사 주변은 역사를 멈춰놓은 듯 현대문명의 흔적이 거의 없다. 안개 자욱한 날 홀로 봉곡사 솔밭 길을 걷다보면 하늘 향해 까마득하게 뻗은 수백 년 생의 곧은 소나무 군상들이 역사의 새벽길을 먼저 가신 선비들로 변신한다. 다산이 굶주리는 백성들을 걱정하며 새로이 접한 서양의 과학을 이용해 더 많은 수확을 낼 농사법을 궁리하며 제자들과 겨울의 눈 내린 새벽길을 올라갔던 바로 그 길이다. 나는 수백 년간 우리의 혼을 지켜온 맹사성,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김구 같은 추상같은 일생을 살다 간 선비들 사이로 걸어가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권좌가 목적이 아니고 오로지 백성과 임금을 걱정하고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우리의 선비들, 학문과 풍류, 그리고 백성을 지극히 사랑했던 님들처럼 검소하고 단아하게 살다가 어느 날 큰 뜻을 위해 남은 명을 아낌없이 바쳐야지 하고 다짐해 본다.
봉곡사를 찾을 때마다 항상 아쉬운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솔밭길을 덮고 있는 아스팔트이다. 단단하고 두터운 아스팔트를 모두 걷어버리면 흙의 속살을 밟을 수 있어 발걸음이 훨씬 더 가벼워질 텐데, 조금 더 편리하자고 거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오대산 월정사는 일주문 바로 뒤 편 전나무숲길의 포장을 걷어냈다고 한다. 봉곡사 솔밭길도 원래의 흙길을 되찾아 준다면 먼저 가신 우리의 선비들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게다.
이기영/호서대 식품생명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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