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26 18:14
수정 : 2005.05.26 18:14
한국의 산에는 주로 다람쥐가 살았다. 내가 청설모를 주변에서 보기 시작한 것은 거의 1990년대 초반부터였다. 그전엔 산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려 돌아보면 재빠르게 달아나 나무 위로 오르는 것은 항상 다람쥐뿐이었다. 다람쥐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꼬리와 특유의 꼬리 끝까지 뻗은 다섯줄의 줄무늬 그리고 작고 아담한 체구를 가졌으며 작은 새장에 넣어서 쳇바퀴를 굴리게 해도 그리 처량하게 보이진 않는 동물이었다.
그런데 이 다람쥐가 언제부턴가 청설모에게 삶의 터전을 내주고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제 도시 근교의 산에서는 다람쥐의 자취를 볼 수가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시커먼 청설모가 차지하고 있다. 청설모도 아름다운 동물이긴 하지만 어쩐지 약한 다람쥐를 누르고 그 자리를 빼앗았다는 데에는 반감이 느껴지는 동물이다.
지난번 일요일에 우연히 깊은 산을 가고 싶어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근교의 험한 산을 찾아갔다. 역시 그곳엔 휴일인데도 별로 사람이 없었다. 그 산은 주로 참나무 군락으로 구성돼 있고, 봉우리는 ‘병풍산’이란 이름답게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얼마 오르지 않았는데 갑자기 ‘부스럭’ 소리가 들려 도마뱀이나 새들이겠거니 하고 돌아보니까 예쁜 다람쥐 한 마리가 입을 삐죽대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카메라를 찾으려 하니까 금방 알고 달아나 버렸다. 실로 얼마 만인가? 이렇게 깊은 산골에서 완벽한 다람쥐를 본 것이. 그래서 카메라 대신 마음속에 깊이 그 모습을 현상해 놓았다.
그런데 그 산에는 올라갈수록 더 많은 다람쥐들이 불쑥불쑥 출현하여 정말 산행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 주었다. 그 다람쥐들은 청설모보다 우선 크기가 매우 작고, 청설모들이 나무 위로 달아나는 데 비해 그들은 땅 위로 내달렸다. 그리고 청설모가 소나무 근처에 많이 사는 것에 비해 그들은 이런 낙엽 활엽수림에 많이 사는 것 같았다.
그나마 서로 서식지가 겹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털 색깔만 보아도 밤색 줄무늬의 다람쥐가 참나무 숲에, 검은색 계통의 청설모가 어두운 소나무 숲에서 위장색을 이룬다. 항간에 가끔 육식도 하는 청설모가 다람쥐를 잡아먹는다고도 하는데 곤충류를 즐겨먹는 청설모가 굳이 사냥까지 하면서 비슷한 종족을 먹는다는 것은 내 경험상 별로 믿어지지가 않는다.
대신 비슷한 종끼리는 서로 동일 장소에서 영역을 나누어 갖기는 힘들다. 그래서 청설모가 많이 없을 땐 인가 근처에까지 내려와 살던 다람쥐가 청설모의 세력 확장으로 인해 깊은 산속 옹달샘 가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한 손님이 돼버렸다. 다람쥐에겐 초등학교 앞에서 쳇바퀴를 도는 수고로움을 면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왠지 쓸쓸해진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나마 다람쥐와 청설모가 삶의 질서를 잡아가는 건 반가운 일이다. 초기 혼란기에는 청설모의 덩치와 센 힘으로 다람쥐를 쫓아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력 시위용으로 먹는 일도 자행되었을지 모른다. 자연이 위대하다는 말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줌에 있다. 산속에서 잘 살아가는 다람쥐를 보면서 그동안 청설모에게만 쏠렸던 내 반감도 어느 정도 가시는 것 같았다. 이제 청설모도 우리 삶의 일원으로 좀 더 따듯한 눈으로 바라볼수 있을 것 같다.
최종욱/ 광주우치동물원 수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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