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31 17:36
수정 : 2005.05.31 17:36
남미의 ‘좌파 바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뉴스의 인물이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다. 남미의 유명 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그를 만난 뒤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보는 듯하다고 했다. “한 사람은 거역할 수 없는 운명에 이끌려 나라를 구한 지사요, 다른 한 사람은 또다른 절대 권력가로 역사에 기록될지 모를 몽상가”라고 했다. 요즘 서방 언론들이 부각시키는 이미지는 뒤쪽이다. 베네수엘라는 독재자의 대중 동원에 놀아나는 나라쯤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한 칠레 출신 여성 작가가 목격한 이 나라는, 실패한 이상을 되살리는 새로운 혁명의 땅 같다. 미국의 <먼슬리 리뷰> 최신호에 실린 마르타 아르네케르의 글은, 대형 알루미늄 공장의 사례를 통해 차베스의 ‘몽상’이 민중들에게 ‘전염’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베네수엘라 남부 공업지대인 볼리바르주에는 알카사라는 이 나라 최대의 국영 알루미늄 공장이 있다. 16년 동안 적자를 면치 못하던 이 공장을 최근 노조가 ‘접수’했다. 노동자들이 뽑은 대표 4명과 정부 인사 2명, 지역공동체 대표 1명 등으로 이사진을 구성하기로 정부와 합의하고, 본격적인 조직 개편을 벌이고 있다. 노조 참여로 이 공장은 벌써부터 활기를 얻어, 일부 품목의 생산량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더 놀라운 것은, 지역 사회에 대한 노조의 시각이다. 트리노 실바 노조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 공장은 회사 구성원들만의 것이 아니라 지역 사회의 것이기도 하다. 사기업 대신 지역 협동조합을 협력 업체로 삼고, 회사가 직원 의료비로 민간 병원에 지급하던 돈(지난해 100억원 가량)을 지역민들이 함께 이용하는 공공 의료시설 운영에 쓸 생각이다.” 노조는 회사가 부담하는 식비와 교통비도 식품 공장과 대중교통 확충에 투입한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이 공장의 실험은, 자본 주도의 세계화 바람이 휘몰아치는 요즘 세상과 너무나 동떨어진 사건이다. 특히 우리에겐 지구 정반대편이라는 지리적 거리와 비교할 수 없는 거리감으로 다가온다.
지난 3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폭력 충돌로 얼룩졌고, 얼마 전에는 현대자동차 노조 간부들의 비리가 터져나오면서, 민주노총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한국노총 간부들의 비리는 더욱 충격적이다. 두 사건이 겹치면서, 노동운동 위기론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한쪽에서 진행되는 비정규직 노조의 투쟁은, 노조 탄압이 극에 달했던 독재정권 시절과 다름없는 양상을 띠었다. 사회적 무관심 속에 울산과 청주에서 경찰과 비정규직 노조가 극렬하게 충돌했다. 기껏해야 일방적으로 부각된 노조의 폭력성만 문제가 된다. 한 중소기업 노조원 전원이 회사 쪽의 부당한 감시와 차별로 인해 정신질환이 생겼다며 집단 산재 신청을 해도 그저 또하나의 사건쯤으로 취급된다.
크게 후퇴한 노동상황과 무관심에 절망하는 현장 노동자와 부패한 노조 간부들이 대비되는 현실은, 한때 브라질·남아공과 함께 세계 3대 노동운동으로 평가받던 이 땅 노동계의 현실치고는 너무 끔찍하다. 사태의 책임을 몇몇에게만 떠넘기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노동운동이 다시 시작하기 위해 지금 시급한 것은, ‘세상을 바꾸자!’며 일어났던 옛 노동운동가들의 열정, 희망, 상상력을 되살리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진정한 해법이 나올 수 없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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