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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02 19:52 수정 : 2005.06.02 19:52

탈근대의 시대에 살아가면서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대한 나의 믿음이 여전히 ‘근대’의 그것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나 또한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는 아닌가를 고민한다. 지난해부터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비리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어느 때인가부터 그들이 예사로운 이익집단과 별로 다르지 않은 행태를 보인다는 판단 때문이다. 물론 노동조합이 그저 힘이 강한 이익집단일 뿐이라면 더 할 말은 없다. 아니 이 기회에 그들에게 주어진 과도한 힘을 회수하는 제도적 방안을 모색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좀더 온건한 새로운 상급단체가 만들어지는 것도 좋지 않은가. 어차피 저마다의 이익은 각자의 행동에 의해 추구될 것이며, 거기에서 발생하는 충돌은 보이지 않는 손이 조정하면 되는 것이다. 터져 나오는 비리 또한 우리 사회의 관행쯤으로 치부해 버리면 된다. 유독 그들만 더 깨끗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양대 노총과 이들이 대표하는 산업노동자가 이 시대의 주인공이라고 믿는다. 또한 나는 아직도 사회의 진보와 민주주의의 진전을 잴 수 있는 잣대의 하나가 바로 노동운동의 발전 정도라고 본다. 사회는 더욱 복잡해지고 사람들 사이의 이해관계는 한층 다양해졌지만, 얽혀 있는 쟁점과 과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는 노와 사, 그리고 정부가 머리를 맞댈 때 보일 것이라고 지금도 나는 확신한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들 또한 나는 안다.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린 근대의 인간들이, 더욱이 자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약한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조합을 결성하고 노동운동을 꾸려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어려움을 돌파하는 하나의 방법은 집단행동으로 얻은 편익을 참여자들에게만 나누어주는 것이다. 가령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노동조합이 꾸려졌다면 획득한 편익 또한 그 사람들 위주로 배분하면 된다. 문제는 이런 대응방식이 집단행동을 지속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노동운동의 발전에는 결코 이롭지 않다는 데에 있다. 더군다나 노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나가는 방식이 다양해지고, 거기에 지불되는 보상의 수준 또한 차별화된 오늘의 상황에선 이런 행태가 노동조합의 사회적 정당성을 침해할 뿐 아니라, 명분과 도덕성이라는 노동운동의 중요한 원천을 훼손한다.

이 땅의 노동운동 주체들이 노동조합은 단순한 이익집단이 아니며, 아니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또한 노동운동의 발전이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집단행동의 딜레마는 다른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는 아니지만 노동으로 힘겹게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의 이익을 어떻게 대표할 것인지, 교사와 같이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는 아니지만 학교 현장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학생과 학부모와 같은 이해 관계자들의 선호는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를 노동운동 주체들은 뼈저리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들의 이익과 선호를 어떻게 대표하고 반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해 왔고, 실행 방법들은 벌써부터 나와 있지 않은가. 잇따른 비리 파문으로 불거진 문제들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연루된 사람들을 처벌하고, 적절한 행동 강령을 만드는 것만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대한 지금의 싸늘한 시선은 정확히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로 향해 있기 때문이다.

홍경준/ 성균관대 교수·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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