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6.08 21:29
수정 : 2005.06.08 21:29
황수정과 최진실이 ‘돌아온다’고 한다. ‘와, 반가워라’ 하는 이들보다는 ‘이르다’거나 ‘글쎄요’ 하는 반응이 많은 것 같다. 셈해 보니 연예계를 ‘떠난’ 세월이 황수정은 4년이고 최진실은 1년이다. 이쯤이면 족한 걸까. 텔레비전 드라마 ‘허준’의 예진 아씨와 그녀의 약물 사건을 ‘분리 수거’하고, CF의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와 그녀의 부부 파경을 ‘친환경 재처리’하는 데 적당한 기한이 얼마인지 난 모르겠다.
다만 ‘가는 사람 떠밀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 성숙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나는 그 여성들의 복귀 의사를 ‘불허’하거나 ‘차단’하는 일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신 황수정의 ‘달라졌을’ 캐릭터와 최진실의 ‘새로워졌을’ 이미지에 더 관심이 간다. 위기와 곤경은 사람을 바꾸는 법. 더욱이 청순 가련과 무공해 순수의 연기력 밖에 없다는 한국의 여배우 시장에서 그녀들은 ‘기회 아닌 기회’를 잡은 드문 인물들이다.
이른바 ‘국민’자 붙는 배우나 가수를 최고로 치는 연예계에서 그 ‘국민’이 실은 다종다양한 집단과 개인을 얼렁뚱땅 총합한 허구라는 것을 깨달으려면, 처음부터 ‘사회 의식화’ 과정을 거치거나 정상에서 추락하는 수밖에 없지 싶다. 화려하게 꽃 피웠으나 뜻하지 않게 꺾여 들판에 버려지고 다시 맨땅을 뚫고 올라오려는 씨앗이 되어 있다면, ‘국민’이 아니라 같은 처지의 아픔들과 구체적으로 소통하려 들테니 말이다.
알다시피 남자 배우들 중에는 연극판에서 ‘배고프고 서러운 사회’를 톡톡히 맛본 경우가 적지 않다. 그들의 매력은 웃으나 서글프고 도도하나 외로운 인간의 또 다른 이면에서 비롯된다. 몸소 겪어본 애환의 생생한 기억이 연기로 승화되고 이미지로 확장된다. 미디어의 조작을 감안해도 우리는 촉수를 뻗어 그것을 매만지고 가슴을 열어 그것을 받아들인다. 황수정과 최진실이 ‘돌아온다’면 나는 그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매스컴을 통해 오는 그들의 이야기는 사정이 좀 다른 것 같다. 황수정은 “저에게 한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욕심부리지 않고 진정한 연기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요”라고 말하고, 최진실은 “오직 연기자로만 남겠다. 나를 잊지 않은 시청자들과 팬들이 있어 감사하다”라고 말했단다. 너무 약하다는 느낌, 헛헛한 마음, 알맹이가 빠진 기분, 핵심을 빙빙 도는 아쉬움이 든다.
차라리 황수정이 욕심을 내면 좋겠다. ‘국민’의 총애를 받는 꽃이기를 그만두려는 욕심 같은 것. 최진실은 연기자로만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아픔을 나누는 자리에서 연기자 이전에 세상과 만나려는 것. ‘돌아온다’에 가슴 졸이며 다시금 ‘국민’과 ‘여론’의 틀에 맞추려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본 값비싼 인생 수업은 먼지가 된다. 돌아오되 화끈하게, 획기적으로, 전과 다르게 돌아오라.
“죄송합니다”와 “감사합니다” 외에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러 ‘돌아온다’면, 황수정과 최진실은 복귀 찬반과 상관없는 새로운 게임을 할 수 있다. 거기에는 ‘다른’ 황수정과 ‘다른’ 최진실을 ‘반가워라’ 할 또 다른 시청자와 팬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참, 김우중 전 대우그룹 총수도 6년여의 방랑을 끝내고 곧 ‘돌아온다’고 한다. 그는 어떤 김우중을 준비하고 돌아오는 걸까. 그를 기다리는 팬들은 누구일까.
김종휘/ 문화평론가·하자작업장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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