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6.12 17:49
수정 : 2005.06.12 17:49
‘한국과 미국은 같은 목표를 갖고 있다’고 선포하기 위해서였을까. 혹은 노무현 대통령이 언급한 ‘해결되지 않은 한두 가지 문제’를 들어보기 위해서였을까. 미국 쪽 요청으로 갑작스레 열린 한-미 정상회담이 끝났다. 9월에 공식 일정이 잡혀 있는 터에 왜 이런 자리가 필요했는지, 짧은 기자회견 내용만으로는 그 이유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굳이 미로 찾기 같은 외교적 언사의 행간을 들춰보자면, ‘시간’과 ‘시한’의 견해차를 조율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6자 회담을 지렛대로 해서 어떻게든 북핵 문제 해결의 시간을 벌고자 하는 우리 쪽 입장과, 북쪽에 시한을 설정해 두고 여의치 않을 때는 강공도 불사하겠다는 미국의 입장이 서로 ‘까놓고’ 마주쳐 보자는 것은 아닌지. 어찌됐든 미국 대통령의 개인 목장에서 술 한잔 건네면서 2박3일쯤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것보다야 못하겠지만 잦은 만남이 나쁠 것은 없다. 한국은 ‘작고 약한 나라’니까. 전문적인 정치분석가들의 향후 전망을 기대하면서 나는 이 긴 여행 후의 1시간짜리 ‘벌쭘한 만남’에 대해 좀 사사로운 소회를 풀어놓고 싶다.
내게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인식은 부시 이전과 이후가 퍽 다르게 느껴진다. 광주학살의 배후 운운하는 반미 분위기가 아무리 성행해도 미국 선망을 떨치기는 힘들었다. 20세기 100년간 인류의 모든 위대한 성과가 미국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레지던트 부시의 등장은 내게 다음과 같은, 너무도 당연한 진실을 마치 처음처럼 확연히 일깨워 주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힘센 나라다!’
그리고 부시 등장 후 세트로 떠오르는 두 지도자가 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와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 애완견 푸들 취급을 받으며 부시에게 찰싹 달라붙은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이익을 얻었는지 자세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이라고 ‘배알’이 없지는 않을 거라는 점은 분명하다. 번역된 토니 블레어의 저서를 읽어보면 그가 제3의 길 이론에 정통한 상당한 식견을 갖춘 지식인이라는 걸 알 수 있고, 사무라이풍의 고이즈미는 대단한 강골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은 국제사회의 온갖 조롱을 아랑곳하지 않고 애오라지 미국을 향해 굴신의 처신을 해오고 있다.
국교 수립 후, 도므어이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이 노구를 이끌고 내한한 적이 있다. 그는 지난날의 ‘침략국’ 한국 땅에서 거의 굴욕일지도 모를 참배절차를 묵묵히 수행했다. 그의 굳은 표정에서는 ‘조국이 먹고사는 데 보탬이 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마다지 않겠다’는 결의가 읽혀졌다. 노정치가의 굴신은 눈물겨웠다.
노 대통령은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렇다면 집권자가 최종적으로 떠안아야 할 핵심적인 과업은 무얼까. 바로 국가 안보가 아니겠는가. 미국 전투기의 북폭 한나절이면 그야말로 ‘서울 불바다’가 허언이 아닌 게 증명될 것이다. 북쪽 방공망의 대부분이 서울을 겨냥하고 있으니 말이다. 당장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목격했으면서도 ‘위기를 과장하지 말라’는 세칭 진보인사의 발언은 무엇이며, ‘북한 제재에는 전쟁을 포함한 모든 수단이 가능하다’는 전직 서울시장의 소위 우익대표 발언은 또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6·25를 불러온 애치슨라인의 복제판으로 라이스라인이 거론되는 즈음이다. 어떠한 자료를 봐도 우리가 다급해할 사정이 많지 저 우격다짐 네오콘들이 우리 바짓가랑이를 붙들 이유는 없어 보인다. 굴신, 아름다운 굴신이 있다. 지금 우리는 목숨을 거는 대화를 하고 있는 중이다.
김갑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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