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6.13 17:57
수정 : 2005.06.13 17:57
동북아 공동체나 동북아 평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동북아시아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역사교과서와 야스쿠니 참배 논란이 보여주듯 침탈과 저항의 역사가 빚어낸 경계의 시선을 서로 거두지 못한 채 여전히 삐걱거리는 현실의 동북아는 한·중·일과 극동 러시아를 아우른 지리적 개념으로서의 동북아시아일 뿐이다. 이 동북아가 유독 한국에게는 콤플렉스로 남아있다. 열강의 한반도 쟁탈전을 구경만 하다가 20세기의 절반을 식민지로 전락했던 굴욕, ‘고려인’과 ‘조선족’으로 남겨진 동북아 유민의 상처, 그리고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진 냉혹한 강대국정치의 기억을 보상받으려는 욕구가 우리의 집단무의식에 ‘민족’과 더불어 ‘동북아’라는 단어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강탈당한 근대를 돌려받을 기획의 무대로 동북아를 지목하고 동북아 환상곡으로 오욕의 역사를 고쳐 쓰려는 정치적 낭만의 뿌리는 이것이다.
근래의 정치 스캔들도 이 동북아 콤플렉스의 소산이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대미 의존적인 중동 석유 매입 전략에서 벗어나 에너지자원의 동북아 시대를 시도했을 가능성이 큰 러시아 유전 스캔들과, 애초에는 동북아 경제중심을 지향했다가 행담도 개발 의혹에까지 연루된 동북아위원회의 비전은 모두 이 콤플렉스에 닿아 있다. 특히 거창하게 시작했다가 싱겁게 수그러든 동북아 균형자론은 동북아시아를 낭만의 무대로만 여기고 접근한 대표적 사례다. 미국과 중국 어느 한편에 서겠다는 강박관념을 버리는 것이 그 취지라고 정부는 밝혔지만, 동북아 세력 균형을 위해서 어느 쪽과도 자유롭게 연대할 균형추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겠다는 말인지 모호한데다가 정부 설명대로 균형자 역할의 바탕이 한미 동맹이라면 중국 봉쇄로 귀결될 미국의 태평양전략과 충돌하지 않고 어떻게 그 역할을 할 것인지 알 수 없다.
결국 지난 주말의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동북아의 최종 균형자는 미국이라는 궁색한 해명까지 하면서 한국정부 스스로 물러서는 바람에 한 때의 ‘외교적 독백’으로 끝나버린 동북아 균형자론은 강대국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열망의 선언으로 기록될지는 몰라도 외교 전략으로서는 완벽한 실패다. 프랑스와 러시아를 치밀하게 견제하면서 19세기 유럽의 실세 균형자로 군림한 영국은 결코 균형자를 자처하지 않았다. 균형자의 비전 자체는 웅변적이지만 국제정치는 웅변의 정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이번 정상회담에서 미국 대통령은 북한 인권을 거론하는 한편 작년 6월의 대북 제안을 넘어선 추가 제안을 사실상 거부함으로써 북한의 핵만 저지하려는 6자회담의 여타 당사국과 달리 북한의 핵과 체제를 하나로 볼 것임을 재차 천명했다. 즉 6자회담의 5개국이 동북아시아 국가지만 북핵의 해법에 ‘동북아’가 낄 자리는 없다. 이렇듯 정작 현실에서는 지리적 명칭에 불과한 동북아시아에서 먼저 외교적 비전의 실현을 꿈꾸다가는 앞으로 다가올 북핵 이후 한반도 정세의 변화를 몰고 올 현실의 국제정치에서 또다시 좌절할 우려가 크다. 북핵문제와 주한미군의 성격 변화 문제를 다룬 이번 한미정상회담의 자세한 속사정은 미루어 짐작할 뿐이지만, 균형자는 고사하고 북핵과 한반도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될 강대국 게임의 파트너 역할조차 간단치 않은 곳이 지금의 동북아라는 것을 노 대통령은 백악관에서의 굳은 표정으로 보여주었다. 동북아는 분명히 21세기의 중심 무대지만 한국은 변화하는 미국의 동북아전략과 이 게임의 줄거리와 규칙부터 간파하고 무대에 올라야 한다. 한국의 ‘동북아’는 어제를 보상할 낭만이 아니라 내일의 현실일 뿐이다.
권용립/ 경성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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