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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14 19:32 수정 : 2005.06.14 19:32

올해 초반만 해도 그동안 경제의 발목을 잡았던 소비와 투자가 회복기미를 보임에 따라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그러나 올 1분기의 국내총생산 성장률이 생각보다 낮은 2.7%라는 발표가 나오면서 미래에 대한 전망은 다시 우울한 분위기로 돌아서고 말았다. 하지만 한 사회의 심리가 성장률의 변화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지난 2002년 세계적인 불황 속에서도 우리나라는 7%의 기록적인 성장률을 달성한 바 있다.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면, 그것은 막대한 빚과 저금리 위에 놓인 거품 위의 성장이었다. 경제활동인구의 15%에 이르는 신용불량자와 치솟은 집값은 아직까지도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한국처럼 대외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국외여건의 변화에 따라 성장률이 쉽게 출렁거리는데, 이때마다 여론과 정책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문제다. 성장률이 조금만 내려가도 경제주체들의 불안심리에 기대어 별 효과도 없이 부작용만 양산하는 경기부양책을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모든 사회적 가치들을 경쟁력 제고라는 목표에 종속시키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다.

한국경제의 핵심문제를 ‘저성장’으로 요약하는 것 또한 정확한 현실진단이 아니다. 현재 중산층과 서민이 겪고 있는 고통의 뿌리는 저성장이 아니라 ‘양극화’라고 보아야 한다. 문제는 세계적인 대기업들이 막대한 수익을 거두고 있음에도, 부자와 빈자·대기업과 중소기업·수출과 내수·제조업과 서비스업·정보기술 산업과 전통적 산업·수도권과 지방간의 연결고리가 끊어짐에 따라, 이들 수익이 국민경제의 곳곳으로 흐르지 못하는 데 있다. 세계화와 기술진보로 국민경제 내의 연관관계가 크게 약화된 상황에서 진행되는 성장 일변도의 실험은 양극화만을 부추기게 된다. 그것은 사회적 다수로부터 교육과 훈련의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그간의 성장 잠재력마저 갉아먹을 가능성이 높다. 기업활동의 자유만을 극단적으로 존중하는 상황에서 빚어진 양극화가 공동체와 민주주의에 대한 얼마나 심각한 위협이 되는가는 <화씨 9.11>의 감독이기도 한 마이클 무어의 <로저와 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양극화의 대세를 저지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고성장에 대한 집착을 벗어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블룸버그 통신>의 윌리엄 페섹 주니어도 한국경제에 필요한 것은 빠른 성장이 아니라 양질의 지속가능한 성장이라고 충고한다. 숙련된 노동력과 두터운 중산층을 적극적인 내수기반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코노미스트> 최근호의 제언 역시 같은 맥락을 띠고 있다. 수출보다 내수가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기업과 시민의 관계도 한층 정상화될 것이다. 이제 시민은 비용절감의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유효수요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개발을 통한 성장’이라는 낡은 패러다임을 과감히 버리고 탈산업화된 지식정보화 사회에 조응하는 새로운 고용기회의 창출에 지혜를 모으는 일도 중요한 과제다. 도소매 숙박업 음식업 등의 비율을 줄이고, 대신 보육·간병·요양·교육·정보센터 등 사회서비스 부문의 고용을 늘리는 방향으로 산업구조 전환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사회서비스 부문의 고용비중(12.6%)이 북유럽(33%) 등 선진국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들 부문은 전통적 산업의 유휴인력을 효과적으로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건강한 공동체의 토대가 됨으로써 양극화에 대한 유효한 보호막도 될 수 있지 않을까.

박종현/ 국회도서관 금융담당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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