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6.19 17:45
수정 : 2005.06.19 17:45
3년 전 한 방송토론에서 필자는 당시 새로운 ‘희망’으로 급부상한 노무현 대통령 후보가 신자유주의에 대해 어떤 문제인식을 갖고 있는지를 알아보았으나 답변은 오리무중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1년을 평가하는 또 다른 방송토론에서 상대 토론자로 나왔던 대통령의 실세 측근은 방송이 끝난 후 필자에게 목청을 높여 이렇게 강조했다. 자신이 10년 전부터 잘 아는 대통령은 ‘개발주의자’라는 것,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그 이후 이 말의 실체가 더 확실하게 드러난 셈이다. 지난해 말에 있었던 시민사회단체들의 ‘환경 비상시국 선언’이 바로 그 심각성을 웅변해준 것이었다.
개발주의가 양적 성장에만 몰입한 나머지 삶의 질과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협하는 위험성을 지닌 것이라면, 신자유주의는 ‘배제의 사회’를 정당화하고 계급적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문제를 내포한 것이다. 그래서 개발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결합은 더 큰 걱정을 낳을 수밖에 없다. 개발주의는 누구를 위한 것이며,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미래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해 대통령은 지금 어떻게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 거듭 절박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아랫목을 더 뜨겁게 덥혀야만 윗목에도 온기가 흐른다.” 아랫목과 윗목을 아예 차단해 버리는 오늘의 배제의 사회에서 이 말은 의미가 없다. ‘성공시대’를 떠들어대는 것은 성공의 예약석이 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고경영자의 연봉이 수십억원대로 치솟는 세상에서 월 몇십만원의 최저생계비도 없는 빈곤층이 늘어나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아주 조직적이고 기획적인 사회적 배제를 그 원동력으로 삼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회적 배제는 성장의 부산물이나 부작용이 아니라 성장의 논리 그 자체이며 그 필연적 결과는 바로 사회적 양극화로 나타난다.
김영삼 대통령은 ‘무한경쟁’과 ‘세계화’를 무작정 외쳤고,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적인 기업 몇 개만 있으면 나라가 살 수 있다”고 역설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선포한다. 이처럼 개발독재를 넘어뜨린 역사 위에 세워진 정권들이 ‘개혁’의 이름으로 신자유주의에 선선히 항복하거나 아니면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민주화와 선진화의 지름길로 가는 개혁인 것처럼 호도해 왔다. 왜 그럴까? 그것은 나라의 운명보다 5년 임기와 정권 재창출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 아닐까?
신자유주의의 실패와 폐해가 벌써부터 외국의 다양한 경험들 속에서 그 암울한 모습을 드러냈건만, 우리 사회에서는 그 경종이 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소수의 기득권을 위한 약육강식의 원리에 절대 복종하는 것만이 다수가 살아남는 길이라는 등식이 날로 더 힘을 얻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방치하고 조장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면, 왜 민주국가를 원해야 하는가? 국가는 출산율을 걱정하기 이전에 다음 세대들이 어떤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인지를 먼저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 세상에 대한 비전은 정권유지를 위한 임기응변의 무책임한 낙관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는 아이가 자신의 일생을 자신 있게 설계할 수 있을 정도로 지속가능한 사회의 구체적인 그림을 담아야만 한다. 그러한 그림을 제시할 수 없다면, 왜 개혁을 말해야 하며, 무엇에 참여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영자/ 가톨릭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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