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6.19 17:49
수정 : 2005.06.19 17:49
어느덧 세계 10위에 육박하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이다. 덕분에 한때 ‘선진국’ 경제의 특징으로 추앙하던 수많은 것들 - 자가용, 소비경제, 정보통신(IT)산업 등등 - 도 이제 아주 익숙한 것들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산업사회의 필수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소화하지 못해서 쩔쩔매는 뜨거운 감자가 있다. 바로 ‘노동’이다.
80년대 말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이 생길 당시 지배 세력은 “교직은 성직이므로 노동조합을 만들 수 없다”는 희한한 논리를 동원하였다. 정작 ‘성직자’ 대접은 않으면서 순전히 탄압을 가할 목적으로 마구 추어올리는 모습도 황당했지만, 노동조합이란 본래 품이나 파는 천한 ‘노가다’들이 돈 몇 푼 더 받으려 벌이는 악다구니 짓이라는 천박한 노동관에 말문이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 ‘교직=성직’이라는 말도 60년대 활발하게 성장하던 일본의 교원노조를 탄압하기 위해 자민당의 보수 세력들이 만들어낸 논리를 그대로 베껴온 수입품이었다고 한다. 결국 대한해협 넘어 이어졌던 이 부조리극은 ‘성직자’인 교사들이 줄줄이 엮여 ‘노가다’처럼 끌려가는 부조리한 결말을 낳은 바 있다.
15년이 지났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노동이라는 말이 자리를 찾은 것도 아니며, 노동에 맞서기 위해 외국에서 엉뚱한 논리를 가져다가 쓰는 보수진영의 행태가 바뀐 것도 아니다. 한 예로 ‘서비스 제공자’라는 말을 들 수 있다. 신자유주의의 발원지라 할 영국에서는 80년대 공공부문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벌어졌다. 당시 대처 총리가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힘으로 제압하면서 내밀었던 논리가 “여러분은 노동자가 아니라 서비스 제공자”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비스 수요자인 국민들의 필요와 이해에 맞추어 마땅히 모든 것들을 감수해야 할 존재라는 논리였다.
웹진 〈대자보〉의 보도를 보면, 지난 3월18일 시작된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노사분쟁은 최근 여성 해고자들 50명의 집회를 막기 위해 200명의 구사대가 동원되는 등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분쟁은 중증 치매나 관절염 등으로 거동이 불가능한 장애인들을 가족으로 둔 직원들에게 일방적인 원거리 전보 발령을 내렸던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사실상 해고에 가까운 이러한 조처에 올해 초 “국민에게 서비스를 최대한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조직을 만들기 위해 사생결단으로 덤비려 한다”고 기염을 토한 바 있었던 이성재 이사장의 경영관이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서비스 제공자’들이 장애인 가족을 팽개치기도 하고 종종 구사대로도 동원되는 새로운 부조리극이 펼쳐지는 것일까. 노동자들은 케케묵은 성직 운운의 논리에서 풀려나 서비스 제공자라는 산뜻한 이름을 얻게 되었으니, ‘개혁’이라면 개혁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알고 싶다. 이 좁은 나라에서 함께 땀 흘려 살아가는 이웃들을 ‘노동자’라고 부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그 말을 피하기 위해 오대양 육대주를 뒤져 온갖 기발한 이름들을 찾아오는 짓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홍기빈/ 캐나다 요크대 박사과정·정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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