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6.21 17:59
수정 : 2005.06.21 17:59
이십대 중반을 훌쩍 넘긴 늦은 나이에 군에 다녀온 나는 지금도 가끔 민둥산 중턱을 향해 60m 박격포를 쏘아대거나, 낫질을 제대로 못한다고 고참에게 얼차려를 받는 꿈을 꾸곤 한다. 제대로 된 낫질을 가르친 나이 어린 고참을 한 번쯤은 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런 만남을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은 없다. 군의 경험은 꿈에 여태까지 나타날 정도로 강렬했지만, 결코 유쾌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지 싶다. 그 탓인지 몰라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어린 아들은 군대에 가지 않았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럼에도 병역의 의무가 국민의 신성한 의무로 남아있는 한, 어쩔 수 없이 그를 군에 보내야 할 것이다. 아들에게 외국 국적을 만들어 줄 생각도, 재간도 나에겐 없기 때문이다. 총기사고로 어처구니없이 아들들과 생이별을 하고 울부짖는 부모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 중에서 좋아서 자식을 군대 보낸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당연한 일이려니 여겼다가 갑작스럽게 참척을 당한 부모들의 애간장은 돈 없고 빽 없어서 우리 귀한 아들 군대에, 그것도 최전방에 보냈다는 죄책감과 억울함에 마디마디 끊어졌을 것이다. 이들을 위로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군대에 아들을 보내 놓고 잠 못 이룰 수많은 부모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종류의 사고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대다수의 병사들은 분노와 콤플렉스에서 비롯되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가지고 군에 간다. 자유분방하고 나약한 신세대라서가 아니다. 모든 국민이 병역의 의무를 진다는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이 이미 깨져 있음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미 깨져버린 규칙을 지킬 수밖에 없는 스스로가 분하고 억울해서 똑같이 생겨먹은 또 다른 바보에게 잔인하리 만큼 가혹해지는 경험을 우리 모두는 한두 번쯤 해보았을 터이다. 그 가학과 피학이 얽혀 있는 한 이런 사고는 계속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우선 준수의 강제력을 이미 상실한 국민 개병제라는 규칙을 근본적으로 검토해 보자. 모병제로의 전환을 비롯하여 꺼낼 수 있는 모든 안을 가지고 끝장 토론을 해보자. 근본적 대안은 아니지만, 군영 내에서 이들의 분함과 억울함을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군 사회복지사의 배치도 더 앞당겨서 고려해 보자.
해이해진 군의 기강도 바로 세워야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기강이 말로 세워지지는 않는다. 조직에 대한 애정과 업에 대한 자부심이 기강을 만든다. 두 차례의 쿠데타가 우리 사회에 남겨놓은 상처 중의 하나가 군에 대한 천대이다. 30년 이상 군인의 길을 걸어온 끝에 마침내는 번쩍이는 별을 어깨에 단 장군도 군영 밖에선 이름 뒤에 붙는 ‘장군’ 칭호 외엔 별 볼일 없는 게 요즘이다. 장군도 그러할진대, 다른 장교들이나 하사관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오죽하면 사람 다음으로 인기 있는 신랑감이 군인이라는 씁쓸한 우스개 소리가 있겠는가. 짧은 정년과 많은 재해, 정해지지 않은 근무시간과 각종 훈련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출퇴근, 잦은 이사에 따른 별거생활과 자녀교육의 애로 사항들로 점철된 이들의 삶을 내버려둔 채 기강을 세우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뻔뻔한 일이다. 우리나라에는 체계적인 군 복지정책은 물론, 거기에 대한 국가의 책무를 명시한 법률조차 없다. 그런 점에서 군 복지에 대한 국가책임을 명시하고, 복지소요를 포괄하는 ‘군인복지법’의 제정은 시급하다. 방만한 국방예산을 효율화하면 이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홍경준/ 성균관대 교수·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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