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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22 19:50 수정 : 2005.06.22 19:50

1972년 2월1일, 지금으로부터 무려 30여년도 더 지난 일이다. 당시 국민학교 6학년이던 정아무개 어린이가 목을 매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바로 다음날 <동아일보>에 이 사건이 평소 만화를 탐독하고 만화의 주인공 흉내를 잘 내는 등 장난이 심한 정군이 ‘자살흉내’를 내다 죽은 것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같은 날 <경향신문>에는 ‘동심을 좀 먹는 만화공해’라는 특집 기사가 나왔고, 정군 학교와 집 주변의 만화가게 숫자까지 조사되었다. <동아일보>에서는 사설을 통해 ‘출판물에 대한 심의와 단속’을 주문했다.

30여년이 지난 2005년 6월19일, 한 전방부대에서 총기난사 사고가 나 8명이 죽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연합뉴스>에 ‘총기난사 김 일병 게임광’이라는 기사가 났다. 현장의 모습이 마치 컴퓨터 게임속의 장면 같았다는 무리한 연결에서 시작한 이 기사는 김 일병이 게임을 즐겼고, 고참들의 언어폭력도 김일병이 게임을 즐겼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내부구조가 사각형인 GP내부를 사각형 컴퓨터 화면 속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군 관계자의 말을 인용했다. 결국 이 사건은 김 일병이 즐긴 ‘특정’ 컴퓨터 게임과 무관치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고(그것도 군 관계자라는 정체불명의 발언자를 빌어), 대뜸 연결되지도 않는 ‘군당국도 게임세대에 부응하는 인권 및 인성교육 대책을 마련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결론으로 직행한다. 20일치 텔레비전 뉴스에도 김일병이 취미에 ‘게임’이라고만 쓴 게임광인데, 총 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 특정게임을 즐겼고, (슬쩍 비껴간다) 고로 이번 사건도 게임만 즐기던 신세대 장병의 부적응에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기사도 있다. <한국일보>의 20일치 기사다. 이웃 주민들의 증언을 모아, ‘얌전했던 애가 그럴 리가’ 없다는 대목이 기사의 요지다. 그런데, 이 기사의 마지막 3분의 1에는 아무 상관없는 만화이야기가 나온다. 김일병은 만화를 좋아했고, 4월 초 첫 휴가를 나와 무려 ‘16권의 만화’의 판타지 액션물을 빌려보았단다. 노골적으로 기사에 명기하지는 않았지만, 결론은 착한 애였는데 ‘판타지 액션물’ 만화를 빌려보고, 그처럼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암시다.

폐쇄된 공간에서 집단에게 총을 쏘는 게임은 극히 소수의 게임이다. 김일병이 즐긴 게임이 도대체 무엇이고, 정말 중독일 정도로 그 게임에 빠졌는지에 대한 조사도 없이 대략의 추론만으로 기사가 작성된다. 게임에 총 쏘는 장면이 나오니까, 만화에 황당한 액션이 나오니까 게임이나 만화가 문제라는 것이다. 마녀를 만들어서 본질을 희석시키는 모습을 지겹도록 바라봤지만, 제발 이 비극적인 사건 앞에서 본질을 흐리지 말자. 게임광 운운하지 말고, 왜 군대가 한 젊은이를 총기난사의 비극적 주인공으로 만들었는지를 고민해 보자. 그런 고민이 없다면 결국 또 다른 김 일병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게임과 만화를 마녀로 지목해 은근슬쩍 본질을 흐리는 낯익은 테크닉과 함께 또 다른 익숙한 테크닉 ‘어쨌든 남의 탓’을 소개한다. 6월21일, 한나라당은 공식 논평에서 여러 의문을 나열한 뒤 ‘주적개념을 상실한 대한민국 국군의 정체성 위기가 불러온 끔찍한 참사’라고 결론 내렸다. 도대체 이 대목에 난데없는 주적개념? 장난하냐?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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