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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23 18:05 수정 : 2005.06.23 18:05

조선희/소설가

광고회사의 남자직원이 여성용품 광고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왓 위민 원트>라는 영화가 있지만, 신세대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전전긍긍하는 한국사회의 주제는 ‘왓 유스 원트’(what youth want?)다. X세대, 네트워크의 N세대, 월드컵의 W세대에 이어 한 광고회사는 촛불시위 이후 참여와 열정의 영문이니셜을 딴 ‘P세대‘의 출현을 선포했다. 신세대 이름 짓기에 알파벳이 모자랄 지경이다. 문제의 김 일병 사건을 다루면서 개인적인 동인만큼이나 신세대 코드로 해석하려는 언론의 태도에도 이런 신세대 콤플렉스가 있다. 이것이 비단 요즘 사회의 특징만은 아닐 것이다. 사서삼경을 줄줄 외면서 ‘상투를 자르려면 차라리 목을 치라’고 했던 사대부 양반이, 객지에서 신학문 배우고 하이칼라 머리로 돌아온 아들을 보고 기함해서 쓰러진 이래 현대가 봉건을 척결해온 지난 1백년 동안 면면히 이어져온 신드롬이다. 다만, 변화의 속도만큼 지금 그것이 두드러질 수는 있다.

말 나온 김에 나도 작명 한 번 해본다. ‘PC세대’ ‘PD세대’. 개인용컴퓨터가 일상화된 시대에 성장한 세대이기도 하지만, 탈냉전(Post Cold-War), 민주화이후(Post Democracy) 세대라는 뜻이다. 리영희선생이 자서전 <대화>에서 텔레비전 오락프로그램과 요즘 세대의 소란스러움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면서 ‘소음을 참는 능력은 지적 수준에 반비례한다’는 영국 속담을 인용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소음에 강한 편이다. 하지만 유신시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세대로서 나 역시 PC세대와 사이에 서먹함이 있다. 민주주의라는 근대적 가치조차 미완의 과제로 주어졌던 냉전시대를 살면서 몸에 밴 계몽주의적 태도가 이들에겐 ‘복학생 스타일’로 비칠 것이다. 반면, 이들 세대가 ‘쿨’하다고 하는 행동들이 내게 무례하게 또는 무책임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신세대 콤플렉스에는, 우리 몸에 잠복해 있을지 모르는 구시대 악습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격지심이 들어 있다. 또한 다가오는 시대의 징후를 예감하려는 호기심,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불안감도 작용한다. 게으른 영혼은 말년에 지난 시대의 유적처럼 살게 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세대 콤플렉스 뒤에 숨어 있는 시장논리를 간과할 수 없다. 영화사는 극장의 으뜸고객인 ‘19~23세 여성’의 입맛을 연구하고 의류회사는 20대 여성을 위해 유행을 고안한다. 인터넷쇼핑몰 매출의 80%를 20~30대가 차지한다. 정치권도 정체성이 불확실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 신참들에 군침을 삼킨다. 이런 시장전략들이 사회 일반에 신세대 콤플렉스를 주입한다는 혐의가 있다. 신세대 콤플렉스는 때로 신세대 따라잡기, 나아가 아부하기로 발전하기도 한다.

소설가 이문열씨가 한 10년쯤 전에 ‘내 독자들과 함께 늙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새로운 세대와 소통하기 힘들다는 얘기인 동시에, 시장의 주력부대로부터 소원해진다는 상실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문학을 동세대와 공유한 것으로 그는 이미 행복한 것이다. 나 역시 세대간 문화충돌에서 생존하려는 욕망이 있으며, 신세대를 염탐한다는 기분으로 홍대 앞 락카페에 드나들었고, 노래방에서 요새 댄스곡들을 숨차게 불러 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자. 신세대와 교감하는 건 둘째 치고 자기 세대와는 충분한 의사소통이 되고 있는지.

조선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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