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7.04 17:43
수정 : 2005.07.04 17:43
서울대가 논술형 본고사를 확대하는 ‘2008학년도 대학입시안’을 발표하자 기다렸다는 듯 서울의 유수 사립대학들도 비슷한 입시안을 내놓고 있다. 교육부가 애써 별 것 아니라는 듯하는 가운데 교육운동 단체들은 사실상의 ‘대학본고사 부활’이라고 농성을 하는 등 크게 반발하고 있다. 20여 년 전 대학본고사의 폐해를 경험한 세대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대학진학률이 80%가 넘는 오늘날 본고사가 부활되면 학생과 학부모들의 고통이 과거와는 견줄 수 없으리라.
사실 이러한 사태는 작년 가을 교육부가 ‘2008학년도 대학입학제도 개선방안’을 내놓았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교육부의 ‘개선방안’은 학생, 학부모, 교사, 대학당국의 요구를 모두 수렴하는 그럴듯한 포장을 하고 있었다. 학교교육 정상화를 위해 내신성적의 반영비율을 높이고, 사교육비 과열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수능을 등급제로 하며, 대학의 자율적인 학생 선발권을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세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명문대학들은 내신과 수능 등급제가 ‘변별력’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본고사 부활을 공공연히 표방하고 나선 것이다.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이러한 사태를 교육부가 정말 예상하지 못했을까?
나는 교육부의 2008학년도 대학입시안은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규정한다. 그 까닭은 이렇다. 우리나라의 대학은 학문기관이라기보다는 학벌을 취득하는 권력기관이다. 그 입장권이 대학입시다. 모든 사람들이 그 입장권을 손에 넣으려고 무한경쟁을 벌인다. 국가(교육부)는 ‘공정한 경쟁’이라는 절차적 정당성에 기대어 왔다. 물론 부(富)에 따른 사교육비가 이 경쟁에서 실질적인 우위에서 선다고 할지라도 지금까지 교육부는 공정한 심판관을 자처하며 ‘3불(고교등급제, 대학본고사, 기여입학제) 정책’ 등으로 어쨌든 버텨왔다.
그러나 2008학년도 대학입시안은 그 얄팍한 포장을 벗기면 교육부가 ‘대학의 선발 자율권’에 백기를 든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대학의 선발 자율권이란,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대학 서열체제에서는 그리고 사교육이 대학입시를 좌우하는 현실에서는 부를 대물림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막상 포장이 벗겨지자 ‘공교육 정상화’와 ‘3불정책 고수’를 외던 교육부의 반응은 마치 사기꾼이 탄로가 났을 때의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더 이상 ‘입시제도 개선’으로는 안 된다. 대학 간판이 출세를 보장하는 신분증명서인 한,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대학 서열체제가 유지되는 한, 그 어떤 입시제도도 살인적인 무한경쟁을 ‘완화’할 수 없다. 대학입시가 지배하고 있는 한 초중등 교육이 입시교육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간판을 따러 대학에 들어가는 학생들에게서 대학교육의 경쟁력도 기대할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타고난 개성과 재능을 계발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조건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인 입시전쟁을 끝내는 것이다. 입시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대학 서열체제를 혁파하는 것 이외에는 없다.
그 동안 계층상승의 통로로서 일정하게 기능해 온 대학입시제도는 이제 부를 세습하는 계급재생산의 기제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공정한 심판관을 자처하던 교육부가 ‘대학자율권’ 뒤로 몸을 감추는 가운데 실질적 불평등이 절차적 공정성을 압도하고 있다. ‘공정한’ 입시제도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대학 서열체제 혁파와 대학평준화는 이제 더 이상 교육운동의 중장기적 과제가 아니라 당면과제다.
정진상/경상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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