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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04 17:45 수정 : 2005.07.04 17:45

<넬슨 리포트>라는 제목의 정보지를 판매하는 워싱턴의 사설 정보회사가 주미 한국대사관에 보낼 비밀 보고서를 가입 회원 모두에게 보내는 바람에 미국 한반도 정책의 최종 권한이 체니 부통령에게 있다는 보고서 내용이 알려졌다. 이런 내용이라면 우리 정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평양에 다녀온 통일부 장관이 체니 부통령을 만나 북한의 6자회담 복귀 의사를 설명하고 회담 분위기 조성을 위한 협조를 구한 것도 지난 달 워싱턴에 간 노 대통령과의 면담을 피할 만큼 한국정부를 불신하는 체니 부통령이야말로 북핵 타결을 위해 넘어야 할 문턱임을 실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정보 보고’의 속성상 이 보고서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한 체니의 영향력만 강조했을 뿐, 북핵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그의 내면세계는 건드리지 않았다. 하기야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도 언론은 부시 대통령의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만 복음주의니 기독교 근본주의니 떠들었지, ‘9.11’이 터진 그날부터 이라크 전쟁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과묵한 체니의 정신세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지 않았던가.

인문적 교양에 별 흥미가 없는 부시 대통령과 달리 고전과 역사에 심취한 체니 부통령의 정신적 길잡이는 현대 국제정치학자나 전략이론가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를 전공한 미국의 고전 인문학자 빅터 데이비스 핸슨이다. 이라크 전쟁의 정당성을 확신하는 체니의 신념체계도 핸슨의 칼럼집 <전쟁의 가을>에서 엿볼 수 있다. 이른바 ‘네오콘’ 대표선수단에 끼지 못한 핸슨이지만 그는 문명의 진보를 위해서는 악을 징벌할 정의로운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적 전쟁철학을 신봉하는 사람이며, 미국정치의 전통적 이상인 고대의 영웅적 시민상을 동경하는 체니와 ‘코드’가 정확하게 일치한다. 또 전쟁의 본질은 폭력이며 전쟁 앞에서 망설이는 행위를 어리석은 짓으로 경멸하는 핸슨의 믿음은 북한 문제를 이라크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명분을 체니에게 제공하고 있다.

이 핸슨이 며칠 전 미국기업연구소(AEI)가 발행한 잡지에 쓴 글에서 북한 핵 개발을 더 이상 방치할 수도 없고 북한을 섣불리 공격하기도 어려운 지금의 상황에서 미국에게 남은 것은 나쁜 선택(대북 봉쇄와 군사공격 또는 한국, 일본, 대만의 동반 핵무장)과 더 나쁜 선택(북한 핵 개발 방치)뿐이라고 개탄했다. 체니 또한 다른 생각일 리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협상이다. 통일부 장관의 체니 면담, 최근의 북-미간 접촉, 이어질 미국 국무장관의 한·중·일 순방을 계기로 북-미간 대화 물꼬의 가능성이 커진 것도 이런 미국의 고민이 그 배경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완전한 핵 폐기’를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워 직접 대화를 사실상 봉쇄해온 체니가 한국정부가 북한에 제시한 ‘중대 제안’의 내용은 경청했을지 몰라도 ‘김정일의 진의’를 얼마나 경청했을지는 의문이다.

적어도 ‘체니의 미국’은 북한체제의 총체적 변화가 다급한 목표다. 따라서 북한의 핵 무장부터 막고 나서 체제 변화를 유도하려는 미국 대북정책팀 내의 현실파와 북-미간 대화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부터 실현해야 북한을 개방시킬 수 있다는 한국정부의 입장이 관철되려면 북한체제를 변하지 않는 ‘절대 악’으로 비관하는 체니의 숙명론부터 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분위기로 봐서는 열릴 가능성이 큰 제4차 6자회담도 피차간의 면피용 쇼로 끝날 공산이 크다. 평양에서 풀어야 할 매듭도 굵지만 미국 쪽에서 풀어야 할 북핵 위기의 단단한 매듭은 이것이다.

권용립/경성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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