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7.04 17:51
수정 : 2005.07.04 17:51
30년도 넘게 외국에 사는 친구의 고백이다. 요즘도 이따금씩 심신이 극도로 피곤할 때면 악몽을 꾼다고. 악몽이란 다름 아니라 대한민국 군대의 입영영장을 받아들고 절망하는 일이다. 설마하니 꿈이겠지, 이미 다녀왔다고 비몽사몽간에 항변해도 복무기록이 없다는 당국의 차가운 반응이다. 어떤 때는 굳이 다시 가야 한다면 제대할 때의 병장계급만이라도 달라고 애원한다고 한다. 환갑에 가까운 나이다. 몸은 비록 외국 땅에 살지만 절대로 국적만은 버리지 않은 그의 고집이 악몽의 원흉일까. 고통스럽던 군대생활이 꿈에 되살아나는 사내가 어찌 그 혼자뿐이랴. 강도와 빈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 땅의 모든 사내에게 공통된 멍에가 아닐까.
우리 문학 속의 군대도 지식청년에게 모멸감을 강요하는 비인간성의 상징으로 굳어져 있다. 최초의 병영소설인 홍성원의 〈D데이의 병촌〉(1966)을 효시로 김신의 〈졸병시대〉(1985)를 거쳐 수많은 작품들이 징병된 젊은이들의 고통을 그렸다.
군 복무자의 치명적인 부담은 바깥세상으로부터의 단절과 기회의 상실일 것이다. 나라에 대한 충성은 접어두고서라도 병영생활을 통해 비로소 세상을 배웠고, 인간적으로 성장했다는 제대군인의 남다른 자부심도 냉정한 현실 앞에 여지없이 무너진다. 복무 중에는 물론 제대 후에도 한참 동안 자기연마와 사회활동에 뒤처진다. ‘누구든지 병역의무로 인한 불이익한 처분을 받지 아니한다.’ 1980년에 추가된 헌법조항은 군에 ‘끌려가서’ 무언가 억울하다고 느끼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나라의 최고규범이 건네주는 최소한의 위로다. 그러나 공무원 시험에서 제대군인에게 몇 점 가산점을 주었다가 ‘헌법 위반’이라는 철퇴가 내린 나라가 아닌가. 모병제를 택한 나라 중에서도 제대군인에게 공직 취업에 절대적 우선권을 주는 곳도 많다.
물론 그런 나라에서는 사적 영역이 여성에게 열려 있기에 공직에 제대군인을 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징병제도의 피해자는 제대군인만이 아니다. 운 좋게 징집을 면한 사내들도 평생토록 무언가 가슴을 펴지 못하고 산다. 평생토록 은근한 질시와 폄하를 의식하면서 살아야 하는 심리적 부담도 결코 가볍지 않다.
6·25 기념일을 며칠 앞두고 전방부대에서 일어난 엄청난 사건은 실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신참 사병이 아군 전우와 상관을 상대로 무작위 총격테러를 가하는 일은, 실로 전례가 드문 일이다. 군의 기강해이, 열악한 생활여건, 신세대 사병의 의식 변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지휘관의 문책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이제는 좀더 근본적인 문제부터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과연 언제까지 현재의 징병제도를 고집할 것인가? 의무복무제의 최대 취약점은 바깥세상으로부터의 단절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외롭고 고통스런 일을 면한 사람에 대해서는 선망을 넘어 적개심까지 품게 된다. 국민의 일부만이 고통을 당하는 제도는 국민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나라에서는 지원 모병제를 택하고 있다. 부자나라들만이 아니다. 중국과 북한도 모병제도를 시행한다. 그뿐인가. 세계 최빈국의 하나인 네팔도 모병제이다. 물론 모병제는 돈이 든다. 그러나 알고 자원한 사람에게는 책임의식이 있다. 누구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을 모두에게 강요하면서 ‘국방의 의무’라는 차가운 공적 언어로 눌러버리는 제도는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 명예와 자부심에 더하여 인생설계에 현실적인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 징병제냐 모병제냐, 선택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과연 어느 쪽이 나라의 힘을 키우는 데 나을지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시기가 된 것은 아닐까?
안경환/서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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