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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05 21:16 수정 : 2005.07.05 21:16

“리조실록”. 북한이 조선 왕조 실록을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그 고전이 55년 전인 7월 이맘때 북으로 실려가 원고지 90만장에 달하는 401권으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은 학계에서 다 아는 일이다. 지난 7월 1일 평양의 인민대학습당을 찾았을 때 3층 벽에는 그곳에 보존되어 있는 고전을 안내하는 글이 선명했다. 그 가운데는 ‘리조실록’이 서울에서 평양에 오기까지의 연유를 밝히는 내용이 큰 글씨로 쓰여 있었다. 즉 “서울해방전쟁이 있는 후인 1950년 7월초 일군들을 서울에 파견하여 ‘리조실록’을 비롯한 필요한 고전”을 가져 왔다 했고, 전쟁 중에는 최고 사령부 집무실에 보관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향약집성방”, “금강반야경”, “유마힐경”이 포함된다는 설명이다. 북한이 6·25가 일어나고 불과 열흘이 지날 무렵 조선왕조실록을 실어간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당시 이 고전은 보성 전문학교의 교수였던 김일성대학 경제학부 김광진교수가 북한군의 호의를 받아 그 무서운 포화를 뚫고 평양까지 운반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뒤 “더이상 목표물이 없다”라는 한 조종사의 탄식처럼 폐허가 된 평양에서 용케도 불타 없어지지 않은 것은 기적이다.

리조실록은 김일성대학 도서관에 사분의 일(4/1)의 영인본으로 축소되어 전시되어 있다. 원본은 인민대학습당 5층의 서고 깊숙이 보존되어 있어, 실물은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원본에 찍힌 장서각인은 현재 정신문화원 장서각 소장 고전에 있는 인장과 똑같다.

남한의 학계에서 전쟁이 끝나고 10년이 지나도록 그 행방을 모르던 장서각 소장 조선왕조실록의 소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78년 북한의 “력사과학”(86호)에서 홍기문 당시 사회과학원 원장이 “50년 7월 서울을 점령했을 때 한 도서관에 소장된 실록 원본을 평양으로 옮겼다.”고 밝히고 58년 9월 북한 과학 전람회에 전시했다는 사실도 전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학계에서는 피난도중 분실되었다는 설과 북한군이 트럭에 싣고 가다가 버렸다는 둥 심심치 않은 소문만 떠돌았다. 실제로 당시 국사편찬위원장이었던 학계 원로조차도 피난 도중 불타 없어졌다고 기자들에게 전했다.

북한은 왕조실록을 “역대왕들의 권위를 높이고 반동적 통치를 유교적 견지에서 찬양하며 계급적 지배의 강화를 위한 실례들과 악랄한 수법을 후대왕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것(중앙인민위원회 정령)”이라고 하면서도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전문가들이 내려와 부지런히 문화유산을 챙겼다. 그 실록의 번역이 완료된 것은 81년 12월이었고, 1차분이 출간된 것은 89년이었다.

왕조실록은 태조 때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에 걸친 역사적인 사실을 연월일순에 의해 편년체로 기술한 고서이다. 조선왕조는 이 실록을 지키기 위해 나라에서는 수호군 60명과 승군 20명을 배치했다. 그 위에 참봉 2명을 두었던 것으로 보아, 사료보관에 정성을 다했던 것 같다.

그 뒤 오대산본은 일제에 의해 동경대로 옮겨졌다가 관동대지진으로 불타 없어졌고 지금은 국보로 지정된 정족산본이 서울대에 보존되어 있다. 우리의 귀중한 사료는 남이든 북이든 어는 곳에 있든지 소중하게 보존되어야 한다. 문화재는 민족의 유산이어서 그렇다.

지금 한창 논의가 되고 있는 일본 야스쿠니 신사 소장 북관대첩비 역시 남과 북이 뜻을 함께 해서 되찾아 와야 한다. 설사 그 문화재가 유네스코 협약에 따라 원래 있었던 함경북도 길주로 간다 해도 남에서는 민족유산을 찾는 데 앞장 서야 한다. 문화재는 그 민족의 영광이다.


신찬균/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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