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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05 21:17 수정 : 2005.07.05 21:17

“명령 없이 전장 이탈할 시의 즉결처분권을 분대장급 이상에게 7월 26일 0시부터 부여한다.” 1950년 7월 25일 12시에 육군본부가 내린 작전훈령 제12호의 내용이다. 교육지침처럼 보이는 본문에 덧붙여진 독특한 형식이나, 사병인 분대장에게까지 즉결처분권을 부여한 적용범위 면에서, 육본 발행의 이 ‘007 살인면허’는 그 어떤 전체주의 국가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터무니없는 것이다. 다행히 이 훈령은 1951년 7월 6일 훈령 제191호로 취소되었다. 전쟁 초기 북한군의 공세에 끝없이 밀리는 극한상황에서 비상조치로 즉결처분권을 부여했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국군으로서 엄연한 군법이 확립되어 있는 이상 이와 같은 즉결처분권을 행사할 바 없다”는 것이 취소의 이유였다. 즉결처분권이란 게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개념임을 이미 1951년의 우리 군 지휘부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즉결처분이 허용되었던 1년 동안 얼마나 많은 장병들이 상급자의 총칼에 희생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초급장교로 전선에 투입되었던 육사 8기생들의 회고록 ‘노병들의 증언’을 통해 장교들 사이에서도 즉결처분이 마구잡이로 자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1950년 7월 한 달 동안 제8사단 10연대장의 권총에 죽어간 장교만 최소한 세 명이었는데, 소대가 전멸한 후 혼자 살아남았다가 연대장과 마주치거나, 대대장의 작전명령을 받고 이동 중에 연대장의 오해를 받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연대장의 ‘총기 난사’에 적군보다 오히려 아군 희생자가 더 많았던 셈이다. 부하들을 이렇게 죽인 지휘관들이 민간인을 어떻게 다루었을지도 보나마나 뻔하다. 이런 식의 무리한 폭력을 행사하던 불과 서너 살 연상의 일본군 출신들이 대장, 중장을 달고 승승장구하는 동안, 최전방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도 중령을 벗어날 수 없었던 육사 8기생들의 비애가 5.16 군사쿠데타의 주된 이유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니, 즉결처분권이 우리 현대사에 미친 부작용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런 즉결처분권이 지금도 존재한다고 믿는 이가 적지 않다는데 있다. 평시에야 재판을 하면 되겠지만, 전시에는 즉결처분에 의해서 지휘권이 행사되는 것 아니냐는 믿음이 살아있는 것이다. 일부 시민의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만도 아니다. 장성 출신의 어느 국회의원은 작년 가을 군사법제도 개선과 관련한 국정감사 도중 “도망가는 병사는 현장에서 직접 즉결처분하도록 되어 있는데, 지휘관의 관할권을 없애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질의했다. 실미도에서 벌어진 살인을 “교육대장에게 생살여탈권이 주어져 있던 셈”이라고 평가한 사건담당 군법무관의 후일담과 비슷한 수준의 망언이었다. 그러나 전시라고 해서 도망가는 병사를 재판 없이 즉결처분할 수는 없다. 우선 그런 법률이 존재하지 않고, 설사 그런 법률이 새로 만들어진다 해도 기본권 침해로 인해 100퍼센트 위헌이기 때문이다. 적전 직무유기나 군무이탈을 사형에까지 처할 수 있도록 우리 군형법이 규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도 역시 재판을 거친 이후에만 집행 가능하다.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반복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뒤에서 총을 겨누어야만 돌격할 수 있는 군대는 이미 군대도 아니다. 이걸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54년 전에 사라진 잘못된 즉결처분권의 망령만 붙잡고 있는 분들이 미봉책을 내놓으며 백날 군 개혁을 이야기해 봐야, 알몸사진 사건과 같은 인권침해의 재발을 막을 방법은 없다.

김두식/한동대 교수·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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