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7.07 20:16
수정 : 2005.07.07 20:16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건 경악할 일이었다. 우연히 모 신문의 지나간 만평을 보면서 ‘부부 강간법’ 제정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면서 침대 위에 돌아누운 부부위로 ‘차라리 하지 말자’란 글이 써있었다. 그리고, 출산율 저하를 고민하는 가족협회 직원의 괴로워하는 표정이 아랫단에 그려져 있었다. 도대체 이 만평을 놀랍게도 자신의 신문에 버젓이 실은 신문사의 생각 없음이 그저 놀랍고 대단해 보였다.
부부 사이에 강간을 하면서 하지 않으면 부부관계를 할 필요나 재미가 없다는 뜻인가? 아니면 저출산율을 생각해서 강간이라도 해서 해야 할 판에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법안 제정이란 뜻인가? 이런 비슷한 놀라움을 개인적으로 몇 번 겪은 것이 영화 ‘오아시스’ 와 ‘나쁜 남자’, 그리고 요즘 제법 잘나간다는 ‘연애의 목적’을 보면서이다. 이 세 영화 모두 사람들의 입에 꽤나 오르내리고 작품성에 있어서 성공했다고 이야기되는 영화들이었다. 물론 작가적인 상상에 한계가 있을 수 없으며 소재의 제한이란 더욱 있을 수 없다는 것에는 작가의 입장에서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남자들의 지독히 몰지각한 여자에 대한 오해에서 오는 오판은 상상력과는 별개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더구나 남녀 관계를 넘어서 범죄와 사랑을 혼동하는 것에는 심각하고 치명적인 잘못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자들의 개념에서는 ‘강간’ 이라는 무시무시한 범죄가 상대 여자의 미필적 고위에 의한 ‘화간’ 이라는 개념이다. ‘안돼요, 안...돼요, 돼요’ 라는 것이다. 이런 술자리 농담을 학술적으로까지 뒷받침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들고 나오는 것이 메조키즘적 경험을 통해서 여자들이 쾌락을 얻는다고 말하며 ‘강간’을 일종의 피해자 없는 범죄라는 시각으로 정의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더구나 그 뒤로 상대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사랑’이라는 감정까지 가지게 된다는 황당한 발전적 개념 또한 그것이 강간이 아니라 화간이었다는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에서 나오는 무지하고 위법적, 비양심적, 비도덕적, 비인간적 발상이다.
남자는 여자를 강간하고 여자는 충격과 환멸을 가지지만 점차적으로 그 남자에게 묘한 감정을 갖게 된다는 구조는 그 범죄를 사랑으로 포장한다고 해서 절대 용서가 되는 지점이 아니라는 것을 남자들은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여자들이 인정하고 깨닫기를 바라는 것일까? 더구나 그런 범죄심리가 연애의 솔직한 부분이며 결국 연애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영화를 보고있노라면 어떻게 이 땅에서 여자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분노하게 된다.
이러니 몇대 일간지라는 신문 만평에 자랑스럽게, 처벌 대상의 ‘부부강간’을 합법화하는 논리의 그림이 오르는 것은 아닐까? 그것도 신성한 생명탄생을 저출산 문제와 결부시키면서 까지 말이다. 도대체 아이를 안고 행복해하는 부부들의 이면에 강간에 의한 부부관계가 존재했다는 발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경악을 넘어 씁쓸하기까지 하다. ‘강간’이란 명백한 강력범죄이며 상황과 이유를 넘어서 당하는 쪽은 피해자가 된다. 그리고, 정당화 될 수 있는 살인은 있을 수 있으나 강간에 있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결국 한쪽의 일방적인 욕구해소를 위한 범죄라는 것이다.
여성에게 있어서 ‘강간’이란 생명의 위협과 함께 수치심과 인간으로서 느끼지 말아야할 모멸감까지 포함하는 가장 두려운 범죄중의 하나이다. 단 한번이라도 ‘강간’ 의 피해자인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어머니, 아내, 누이로 생각한다면 과연 이런 논리가 가능한 발상이었을까를 묻고 싶다. ‘강간’이 솔직한 연애의 진실된 부분이었고, 결국 그것이 ‘연애의 목적’ 이었다면 이 세상에 ‘연애의 종말’이 온 듯하다.
박예랑/ 드라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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