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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10 20:14 수정 : 2005.07.13 04:08

근대 문명은 인간의 이성을 무기로 삼는 인류사회의 ‘진보’를 자랑해왔지만, 그 이면에는 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야만의 역사가 성장해왔으며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지난 한 세기 동안 줄기차게 울려왔다. 이는 이성에 입각한 문명의 역사가 곧 비이성을 드러내는 야만의 역사라는 사실에 대한 처절한 고발이다.

20세기 초반에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가 근대성에 내재된 비이성적 합리성과 그 야만주의를 비판했다. ‘무엇이, 왜 진보인가?’를 더 이상 의심하고 비판하지 못하도록, 진보의 이름으로 설정된 ‘보편적’ 가치와 패러다임을 절대 유일한 것으로 추종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전체주의적 야만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그 진보의 추동력은 이성의 자기비판적 능력을 마비시키는 도구적 이성에만 몰입한 것이었기에, 이성의 문명은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문명을 예찬하고 정당화하는 역설과 모순에 빠지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아우슈비츠의 참극이 그 대표적인 경험이었다.

20세기 말에 와서는 전체주의적 야만 대신에 ‘부드러운 야만’을 고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피에르 르고프의 지적처럼, ‘부드러운 야만’은 ‘자유’, ‘자율성’, ‘다원주의’, ‘축제’ 등의 가면으로 우리를 무장해제시키는 한편, 사회에서 배제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각자가 ‘자율’, ‘쇄신’, ‘독창성’을 입증해보이도록 강요한다. 부드러운 야만은 카오스적 비전을 내세워 세상의 변화를 이해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 급변하는 상황에 맞추어 무조건 각자의 사고와 행동방식을 끊임없이 전복시키도록 자극하고 동원하는 메카니즘으로 체제를 작동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그 누구도, 또 아무 것도 평온상태에 있지 못하도록 만드는 일종의 영구적 문화혁명으로 몰고 간다.

현대인의 일상 속에는 이러한 전체주의적 야만과 부드러운 야만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확산되고 있다. 전체주의적 야만은 근대 문명이 설정해놓은 ‘진보’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것들을 무참하게 배제시키고 탄압하는 것이라면, 부드러운 야만은 이 배제와 탄압이 오히려 우리 모두를 승리자로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위장하여 개인의 욕구에 부응하고 개인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천사주의’의 얼굴로 다가온다.

여기서 사회구조적인 구속과 억압은 개인의 선택과 자율로 둔갑하고 그 전적인 책임은 사회가 아닌 개인의 몫으로만 남는다. 이 때문에 ‘부드러운 야만’에 대한 저항과 투쟁이 어려워지고 그 야만성에 대한 불감증이 심해진다. 그 부드러움은 야만을 오히려 유혹적인 것으로 포장하고 야만을 문명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최면술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드러운 야만의 천사주의는 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 인간의 존엄성마저도 말살할 수 있는 테러리즘을 은폐한 것이기에 그 폭력성과 잔인성은 더 없이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한국적 상황에서는 전체주의적 야만과 부드러운 야만 모두가 마치 문명의 선진화를 따라가는 불가피한 여정인 것처럼 주입되어왔다. 이는 바로 세계를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이분화하는 서구 근대문명의 야만주의와 이로부터 파생된 ‘진보’에 대한 환상과 강박관념이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영자/ 가톨릭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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