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7.13 20:27 수정 : 2005.07.14 11:41

왕후이

해외시평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나는 윈난성에 세 번 다녀왔다. 그 사이 두 젊은 생명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건 그 가운데 한 사람의 이야기다. 그는 서른도 채 안 됐으나 세상을 떴다.

지난해 6월11일, 아침햇살과 빗방울이 번갈아가며 윈난 서북 시장지역의 치츠딩 마을에 내리고 있었다. 난 ‘장족(티베트족) 전통문화와 생물의 다양성 보호를 위한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를 만난 건 토론회의 휴식 시간 넓은 티베트식 건물 2층 복도에서였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옷차림은 현지인 같았지만 격외의 멋이 풍기는 젊은이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전에 시인 샤오카이위(蕭開愚)와 함께 베이징 싼롄서점의 2층 찻집에서 내가 편집을 맡고 있는 <독서>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 인연이 있다고 자기소개를 했다. 지금은 더친(德欽) 부근 밍융(明永) 마을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한 지 거의 두 해가 되어간다고 했다. 고원지대의 햇볕에 그을린 탓인지 그의 얼굴과 표정은 이미 현지인과 녹아들어 있었다. 나는 이 고원의 기운이 배어나는 얼굴에서 베이징의 찻집에서 보았던 기억을 떠올릴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이 외진 곳에서 일하는 형편과 느낌이 어떤지 물었다. 그는 “처음 왔을 때의 심리적 위기가 지나간 뒤에는 점점 마을사람들의 세계 속으로 녹아들어가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한편으론 티베트 전승 불교의 자료와 저작을 탐독하고 있었다. 가장 어려운 것은 마음이 적응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마화(馬?)란 이름의 젊은 시인으로 상하이 푸단대학 석사를 마쳤다. 두 해 전 그는 베이징의 일터를 떠나 윈난 장족(티베트족)지역에서 일하길 자원했다.

6월12일 오후 우리 일행은 차량 두 대에 나눠 타고 티베트어로 ‘카와거보’라 불리는 메이리쉐산(‘매화 마을 설산’이란 뜻)을 향해 출발했다. 다른 차량에 탔던 마화는 차가 쉬는 틈을 이용해 내 옆으로 와 앉더니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광을 하나하나 상세히 소개해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해준 얘기 가운데 세 가지가 가장 인상 깊다.

첫 번째는 티베트 사람들이 기도하며 산을 오르는 이야기다. 영산인 카와거보에는 오체투지 기도를 하며 오르는 티베트 사람들의 행렬이 그치지 않는다. 그는 분명 이 광활한 장관에 놀라고 매료당한 것 같았다. 우리는 해발 4400m에 이르는 바이마(白馬) 설산을 가로지르며 카와거보에 오르는 티베트인들 이야기를 나눴다. 산봉우리들은 희붐한 안개에 휩싸여 있었고 그의 눈빛은 맑았으며 그의 말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기도하며 이 산을 오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람이 한 명 있다. 그는 이 산을 오체투지 기도하며 서른여섯 번 올랐다. 한번 오를 때마다 열흘이 걸린다.” 그는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이야기엔 신비감이 서렸고 카와거보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상하이에서 대학을 나오고 베이징에서 일하다 설산 고원지대로 온 이 시인은 무엇을 느꼈을까.

두 번째 이야기는 현지 교육 실태에 관한 것이었다. 어느 산길 모퉁이에서 우리는 먼 산허리에 외딴 오두막을 보았다. 그는 이 오두막이 티베트족 형제가 함께 출자해 이 지역 마을사람들을 위해 세운 학교라고 알려주었다. 이들에겐 이 오두막을 지탱할 경비조차 부족하지만 이미 몇 년을 버텨왔다고 했다.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메마른 산허리엔 땅 밑에서 머리를 내민 가늘고 긴 파이프가 마을 사람들의 갈망과 운명을 예시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학교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나는 신문 보도를 통해 그가 다니던 학교엔 교사가 두 명뿐이었고 그 가운데 한명이 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세 번째 이야기는 후탸오샤 댐 건설에 관한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린 마침 더친현성과 이웃한 번즈란진을 지나고 있었다. 들쭉날쭉한 마을의 옛 가옥들을 보면서 그는 후탸오샤에 댐을 건설한다면 이 진의 마을들과 주변 지역은 모두 물에 잠길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 그의 어조는 평온했지만 그의 기색은 침울했다.

더친에 도착한 그 날 저녁, 나는 현성의 신작로를 따라 이리저리 거닐었다. 거리의 빈터에서 티베트족 젊은 남녀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즐거운 표정의 사람들이 점차 주위를 둘러쌌다. 주말 저녁의 흥겨운 한 때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사람들 속에서 마화를 발견했다. 그의 머리엔 여전히 붉은 띠가 둘러져 있었고 조금 길게 자란 머리칼은 그의 스텝에 따라 저녁 안개와 가로등 속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그의 몸은 악기의 리듬에 실려있었다. 나도 따라 흉내를 내보았지만 걸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따라갈 수 없었다. 양편에서 우의를 담아 웃는 얼굴을 통해 나는 내 몸짓이 얼마나 서툰지 알 수 있었다. 이 리듬, 스텝과 몸짓은 춤을 추는 이와 이 세계의 생활과의 거리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람들 주변의 그늘 쪽으로 돌아와 춤추는 이들과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시인의 즐거운 모습을 지켜봤다. 그 때 갑자기 나는 그가 전에 말했던, 이곳에 막 왔을 때 느꼈다는 ‘심리 위기’란 말이 떠올랐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긴긴 터널을 지나온 것이다.


“저 긴 터널을 지나면 눈의 나라(설국)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유명한 그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마 그 때 나의 직업적 본능이 머리를 쳐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우리와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한 이 세계의 이야기를 내가 편집을 맡고 있는 <독서>에 싣도록 하고 싶었다. 쉬는 시간에 나는 그에게 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지난해 마을에 전화선을 깔았기 때문에 인터넷을 할 수는 있지만 속도가 매우 느리다고 했다. 이튿날 우리는 얼음개울(빙천)을 보러 갔는데, 그는 함께 가지 않았다. 우리가 돌아왔을 때 그는 바삐 그의 마을로 돌아갔다.

며칠 뒤 나는 베이징에 돌아와 그에게 메일을 보내, 시간을 낼 수 있으면 우리 잡지에 글을 써달라고 청탁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회신이 없었다. 또 며칠이 지난 뒤 나는 중뎬(中甸)에 사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후탸오샤 댐 건설 계획은 계속 추진중이며, 일단 이 공사가 시작되면 현지의 풍부한 생물자원과 문화유산은 도도한 물결에 잠겨버릴 것이라고 했다.

20여년 동안 고속 성장을 거듭해온 중국 경제는 새로운 에너지 부족 시기에 직면해있다. 경제 규모가 날로 커짐에 따라 시장의 움직임에 민감한 이익집단은 전력 개발의 대약진 시기를 만들어냈다. 여러 가지 발전 방식 가운데 수력발전은 전력 부족을 해결하는 중요하고 상대적으로 깨끗한 방식이라 인정받았다. 그러나 댐 건설이 생태환경에 장기적으로 파괴적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경험에 의해 증명되었다. 물고기, 식물, 하상, 기후, 수질 등 생물과 자연에 영향을 끼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질병 전파, 지진 유발, 원주민의 이주 등 ‘재해’라 해야 할 악영향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1996년 미국 학자 맥컬리(P.McCully)는 <침묵하는 강>(Silenced River)이란 책을 펴냈다. 2001년 이 저작은 많은 친구들의 노력을 통해 <댐 경제학>(중국발전출판사, 2001)이라는 제목으로 중국어권에도 소개됐다. 나는 생태 문제에 관심 있는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 지은이가 제공한 수치에 따르면 1986년까지 중국이 건설한 대형 댐은 모두 1만8820곳으로 이미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세계 2위인 미국의 대형 댐은 5459곳에 머물렀다. 그 뒤 20년 동안 중국이 추가로 건설한 댐의 수량, 규모, 자금 투입과 이주당한 원주민의 숫자는 세계의 다른 어느 나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중뎬에서 걸려온 친구의 전화는 내게 처음으로 후탸오샤 댐 건설 이야기를 들려줬던 마화와, 곧 물에 잠길 위험에 처한 그 인구 조밀하고 아름답던 작은 마을의 운명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나는 이 친구에게 마화와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해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전화기 저편에서 그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내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을 들려주었다. 하루 전 마화는 시내로 가 인터넷 광대역망을 마을에 연결할 수 있겠는지 문의했다. 마을로 돌아오던 길에 그가 탄 차는 급물살이 흐르는 란창강으로 떨어졌다. 길과 강물까지 수직거리는 80m였다고 한다. 어떤 목격자에 따르면 강물 위로 솟아나온 손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것이 이 세상을 향해 보낸 시인의 마지막 신호였다.

그 일은 우리가 헤어진 지 닷새째 벌어졌다. 나의 짧은 편지는 영원히 회신을 받을 수 없게 됐다. 그러나 후탸오샤 댐 문제는 나와 친구들이 여전히 지켜보고 있는 문제다. 그해 8월 나는 마음을 다시 먹고 윈난으로 가 후탸오샤 주변 상황에 대한 사회 조사를 진행했다. 마침 우기를 만나 나와 나를 돕던 두 젊은 친구는 함께 걸어서 하바 설산을 넘었다. 이 덕분에 나는 적지 않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윈난성 발전개혁위원회가 작성한 ‘뎬중 수리이동공정 임무서’에 따르면 현지 정부와 전력집단은 양쯔강 제1만~후탸오샤 유역에 계단식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위치는 양쯔강 상류와 진사강 중류 지역으로 서쪽으로는 윈난성 리장스구진에서 동쪽으로는 판지화시의 야비강 입구에 이른다. 길이는 564km, 낙차는 838m이다. 만약 이 건설 계획이 실행에 옮겨진다면 진사강 상류는 모두 수력발전 개발 범위에 들어갈 것이다. 수려한 장관으로 이미 유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진사강, 란창강, 누강 등 세 물줄기가 함께 흐르는 이 지역 일대는 이로 인해 심각한 파괴를 당할 것이다. 이 지역에는 풍부한 역사 유산이 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나시족, 리수족, 티베트족, 바이족, 이족, 먀오족, 한족 등 여러 서로 다른 민족이 함께 살고 있다. 이들은 각자의 특색 있는 문화를 보존하면서 조화롭게 지내왔다. 수많은 충돌이 터져나오고 있는 이 세계에서, 문화 다양성과 생태 다양성이 잘 보존돼 있는 이 지역은 우리에게 경제적 이익보다 더욱 중요한 계시를 준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 지역을 조사하고 베이징으로 돌아온 뒤에도 윈난의 많은 벗들과 함께 후탸오샤를 보호하는 운동을 발기했으며, 지금까지도 이어가고 있다.

지금 나는 등불 아래 앉아 새로운 <독서>를 편집하고 있다. 이번 호 <독서>에는 도시에 관해 논한 몇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이 도시들은 내가 지금 여기서 말한 외진 시골과는 먼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이 습기찬 밤에 나는 이 두 세계 사이를 연결하는 끈을 찾으려 한다. 마치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그 젊은 시인이 인터넷 광대역망을 그의 외진 마을로 끌어들이려 했던 것과 같이.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오랜 도시 베이징조차 거듭된 철거와 건설로 ‘침묵하는 강’과 같은 운명에 부닥쳤다는 것을. 이 때문에 우리는 ‘발전’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지 다시 생각해야 하고 생태에 대해 토론해야 한다. 나는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이 두 문제는 몇 년 전 일부 지식인들이 <남산기요>라는 문장에서 제기한 바 있다. (<남산기요>는 중국의 지식인들이 하이난다오에서 회의를 개최한 뒤 <톈야>란 잡지에 발표한 선언을 말함.) 이는 지금까지 여전히 존재하는 문제이며 세계 곳곳의 사람들에게 모두 의미가 있는 문제이다.

왕후이/ 칭화대 교수 중문학 w-hui@mail.tsinghua.edu.cn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