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7.14 18:56
수정 : 2005.07.14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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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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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아마도 20년 전쯤이었지 싶은데, 누군가 “교수들이 제일 아는 게 없고 기업인들이 제일 똑똑해.”라는 과격한 발언을 해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 말에는 통념을 깨고 상식에 도전하는 신선함이 있었는데, 지금 똑같은 말을 듣는다면 그렇게 신선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어느 면에서 요즘 지식인의 위상을 적시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한때 지식인들이 사회체제를 논하고 대안을 제시하던 시절이 있었다. 미디어의 통제와 이데올로기 조작이 극에 달했던 시대에 몽매한 대중을 계몽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강만길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을 읽은 사람들이 1987년 6월에 거리로 나왔고 30년 군사정권을 종결지었다. 하지만 한때 진지하고 심각한 인문사회과학 책의 소비자였던 20~30대가 지금은 쇼핑몰이 딸린 멀티플렉스영화관들에 몰려가 있다. 이런 추세가 가속화되면 됐지 결코 반전되지 않으리라는 건, 옛날 ‘문사철’이라 해서 대학의 꽃이었다던 사학과나 철학과가 지금 멸종위기를 맞고 있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지식인이 사회혁명에 동력을 제공하는 건 몇 개의 공산혁명이 일어났던 20세기로 마지막일지 모른다. 지금 우리의 삶과 생각을 바꾸는 사건들, 대표적인 예로 통신과 네트워크의 혁명이라는 것도 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다. 이 혁명이 끝내 우리를 어떤 세상에 데려다 놓을지 아는 건, 기업체 내 연구소 사람들 정도 아닐까. 더구나 한국의 주식시장을 월스트리트의 큰 손이 쥐락펴락하는 이 아찔한 세계화의 신자유주의 시대, 그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변화를 따라잡기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건 언론인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80년대 초반에 기자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내가 순수한 지식인이긴 틀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요즘 신문들도 조직의 이해관계나 커뮤니케이션의 폐쇄회로에서 벗어나 있는 내부 칼럼은 보기 어려우니, 아무리 ‘할 말 다 하는’ 언론이 됐다 해도 본질이 바뀌지는 않은 것 같다. 또, 잡지를 만들면서 나는 지식인보다는 지식장사꾼이라는 걸 보다 확실히 알게 됐다. 지식과 정보를 다루면서 그것의 상품성을 한시도 잊은 적 없었으니 지식장사꾼이란 말이 크게 과장은 아니다.
대학 시절 한완상씨 책에서 읽은 것 같은데, 지식인을 기능적 지식인과 지성인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지성인이라고 불리는 순수한 지식인은 이런 것 아닐까. 현상을 넘어 본질을 보고, 그 어떤 것도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으며, 자본과 권력은 물론 모든 맹신으로부터 자유롭고, 시대의 과제를 자신의 과제로 받아들이는 자. 하지만 거대담론이 사라진 지금, 급격한 변화의 먼지바람 속에서 지식인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어쩌면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지식인은, 비전과 대안으로 대중을 이끄는 게 아니라 복잡다단한 사회현상들을 해석해주고 노자나 장자를 읽어주며 지혜와 위로를 제공하는 역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지식들의 아성인 대학들조차 기업체들의 구심력에 휘말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씁쓸하다. 우리가 오늘날 가전제품들을 종 부리듯 부리고 주말에 자동차여행을 다니는 것도 크게는 기업체들 덕분이지만 기업체가 ‘이윤’ 외에 다른 어떤 가치도 안중에 없는 외눈박이 괴물이라는 사실 또한 명백하다. 고려대는 4백억을 기부한 이건희 회장에게 철학박사학위를 주다가 해프닝이 벌어졌고, 삼성 이사, 전경련 부회장 출신인 손병두씨가 1천억을 모금하겠다는 공약으로 서강대 총장에 선임됐다. ‘CEO’형 총장을 표방하면서 노골적으로 ‘펀드 레이징’에 나선 대학들의 뒤편에서 지식인의 시대가 급속히 저물어간다.
조선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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