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7.19 17:37
수정 : 2005.07.1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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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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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근대의 자유사상가 존 로크가 ‘어떻게 땅의 소유가 정당화되는지’를 설명한 부분은 위대한 사상가답지 않다. 그는 “도토리를 줍는 노동이 도토리의 소유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땅도 노동을 통해 그것을 개간한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로크의 논리대로라면 아직 임자 없는 땅에서 돌멩이를 치우고 울타리를 치는 노동만으로도 땅의 소유는 정당화된다. 물론 그것은 앞으로 다른 사람이 그 땅을 더 쓸모있게 만들기 위해 노동을 투입할 기회를 영구히 빼앗는 것이다.
어쩌면 로크 시대엔 땅이 한정돼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로크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는 자신의 논리가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버려진 땅을 일구어 사람이 살 만한 땅으로 만든 달동네 사람들이 법률상 소유권을 가진 이들에 의해 변방으로 계속 쫓겨나는 것을 우리는 보아 왔다. 로크, 당신 논리로 보면 누가 진짜 임자인가?
땅은 인간의 노동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땅을 사람들 사이에 어떻게 나눠 써야 형평에 맞고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까? 구약성서 시대 유대인들은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지혜로웠다. 그들은 가족단위로 일할 수 있을 만큼씩 땅을 나눠 갖고,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판 경우에도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에 대가 없이 원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했다. 땅은 하느님의 것이고, 인간은 단지 땅을 이용하고 보전할 책임을 위임받았을 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비록 신의 이름을 빌렸으나, 땅은 공동체의 것이며, 각자는 그것을 빌려쓰는 것이라는 사고다.
근대의 토지소유 제도는 땅을 복권처럼 만들어놓았다. 땅값은 그 땅을 이용해 얻을 수 있는 앞날의 모든 수익을 현재 가치로 환산한 것이다. 땅에 사람이 모여들고 여러 편의시설이 들어서면 땅값은 저절로 올라간다. 땅임자는 거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대부분 나라나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다른 사회 구성원들의 노력이 땅값을 올릴 뿐이다. 그럼에도 땅값 상승분은 눈치빠르게 좋은 자리를 선점한 땅임자 몫이 된다. 성실한 노동과 기술 혁신, 저축을 통한 투자의 성과물을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땅이 차지한다는 것은 얼마나 반자본주의적인가.
내 돈으로 저축을 하든, 주식을 사든, 땅을 사든 그것은 어차피 선택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에게는 그것이 선택이라고 해도 무엇을 상품으로 허용하느냐는 공동체가 결정할 몫이다. 로크식 논리의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땅은 소유와 투자의 대상이 아니라, 이용의 대상으로 봐야 한다. 이용하는 만큼 공동체에 사용료를 내게 해야 한다.
물론 지금 땅을 소유한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선의의 제3자’다. 이미 앞 주인에게 땅에서 나올 미래 기대수익을 현재가치로 할인해 값을 치르고 사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값을 치르지 않은 향후 땅값 상승분을 공동체가 회수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날 자본주의 나라들이 토지관련 세금을 강화하고 소유권 행사에 제약을 가해온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우리나라의 땅은 국민의 1%가 절반을 갖고 있다. 재산세 등 보유세는 외국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러고도 토지투기가 근절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땅이 노동의 성과물을 빼앗아가지 않도록 하자는 것, 그것이 토지공개념이다. 만약 그것이 위헌이라면 헌법이 틀렸다고 말해야 한다.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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