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7.21 20:08
수정 : 2005.07.22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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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호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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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깼다. 건너편 아파트 상가 횟집 손님들이 떠드는 소리였다. 짜증이 확 일었다. 밤 10시께 잠들 무렵에도 떠들더니, 아직 안 끝났단 말인가? 베란다 창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런데 건너편 아파트 절반 이상이 환하게 불을 켜고 있었다. 새벽녘이라 생각했기에 예상치 못했던 그 풍경은 무섭기까지 했다. 시계를 보니 12시30분. 시차 적응이 덜 된 탓에 토막잠을 자다 깬 것이다. 자정이 넘어도 반 이상이 깨어 있는 곳. 한국이었다.
1년 동안의 미국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지 딱 1주일 지났다. 겨우 1년 미국 물 먹었다고 이런 말 내뱉는 게 나 스스로도 역겹지만, 솔직히 힘들다. 내 나라에 적응하는 것이.
공항에 내리자마자 ‘훅’ 하는 입김을 내뿜으며 나를 끌어안는 후텁지근한 날씨, ‘왔구나~’ 하는 이은관 명창의 배뱅잇굿 가락이 귓전을 맴도는 듯했다. 하늘을 다 가린 네모 아파트 기둥, 숨이 콱 막히는 공기, 1년 동안 떠나 있던 지병인 알레르기성 비염이 귀국 며칠 만에 ‘돌아온 장고’로 나타나 내 콧구멍에 불꽃놀이를 해댄다.
이런 물리적 환경보다 더 힘든 건 ‘사람들’이었다. 시도때도없이 울려대는 경적 소리에 예전에도 이처럼 예민했던가? 쇼핑몰에서 꾸물대는 나를, 마치 길 비키라는 듯 밀차로 ‘퉁’ 치고도 아무 표정 변화 없이 지나치는 아주머니. 화보다 허탈함이 일었다. 남에 대한 무례함, 무배려, 공격적 몸짓이 시차적응의 벽을 더 높였다.
미국을 떠나기 전, 한 교민이 말했다. “1년 있다 간 사람은 적응에 1년, 2년 있다 간 사람은 2년 걸린다”고.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것이 ‘사람’에 대한 적응일 줄은 몰랐다. 거창한 국가관을 들이대기 이전에 내가 나고, 자라고, 거리마다 추억이 서려 있는 이곳이 (시차적응 기간이라 하더라도) 내게 낯설고, 벗어나고 싶은 곳이라는 사실이 서글펐다.
아파트 불빛(그것도 차가운 형광등 일색인)을 바라보며, 나는 내 몸에 서서히 가시가 돋쳐 고슴도치로 ‘변신’하는 걸 느꼈다. ‘나도 가시가 있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남들의 가시에 찔려 나만 상처입을 뿐이야’라는 독백과 함께. 그러면서 불현듯 그 가시가 실은 보드라운 살점을 지키려는 방어용 궁여지책이라는 것에 생각이 닿았다. 조금은 혐오스러웠던 내 이웃이 갑작스레 연민의 대상으로 바뀌는 순간. 달밤의 작은 해탈이었다.
한국인의 유전자가 특별히 모날 리가 있나? 워낙 좁은 땅에 많은 사람들이 부딪치다 보니 이런 것 아닌가? 좁은 땅은 이처럼 우리네 고운 마음결마저 해쳤다. 친구들을 죽여야 내가 살아남는 <배틀로얄>의 서바이벌 전사처럼, 그렇게 전쟁하듯 사는 게 우리네 ‘일상다반사’ 아닌가? 그리스 신화의 가장 밑바닥 지옥인 타르타로스. 그곳은 과일나무를 눈앞에 보면서도 따 먹을 수 없어 늘 목이 탄다. 그리고 머리 위에는 실에 매달린 큰 돌이 떠 있어 늘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 어째, 자꾸 내가 사는 ‘대한민국’의 잔상이 떠오른다.
무딘 내 머리로는 이 전장을 바꿀 묘책이 안 떠오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 대책에 실낱같은 희망을 또한번 걸고 있다는 건 안다. 가진자들에 대한 ‘복수혈전’을 바라는 게 아니다. 언제 내 머리 위로 떨어질지 모르는 ‘집값 폭등’의 큰 돌을 좀 치워달라는 거다. 그러면 서로를 찌르는 가시옷도 서서히 벗겨지지 않겠는가? 나의 시차적응이 둔감과 체념으로 해결되길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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