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7.25 18:36
수정 : 2005.07.25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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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립 경성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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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영화 <마지막 황제>의 주인공 푸이는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마지막 황위에서 쫓겨나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허수아비 황제를 지냈고, 이차대전 후 소련의 전범 수용소를 거쳐 중국으로 송환되어 식물원 정원사로 생을 마쳤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손 이구씨는 나라 잃은 왕실에 태어나 허울뿐인 왕실 적통으로 떠돌다가 동경의 객주에서 생을 마쳤다.
이구씨의 부음을 듣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연상하는 것은 황족에서 시민으로 추락한 그들의 삶이 비슷해서가 아니다. 왕조시대를 매듭짓는 두 나라의 방식이 판이해서다. 중국 정부는 십년간의 사상교육 후 푸이를 시민으로 방면했다. 예우 아닌 모욕이었다. 그러나 왕실을 봉건적 수탈계급으로 규정한 중국 공산당으로서는 오래 전에 끝난 왕조시대를 뒤늦게라도 매듭짓는 ‘정치적 의전’이었다. 반면 대한제국과 임시정부를 계승한 한국은 조선왕조를 정면으로 부정하지도 않고, 왕실의 위신과 전통을 복원하지도 않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의 조문 말고는 왕조시대를 마무리한 일이 없다. 그 대신 망각했다. 이 때문에 조선 왕조는 일그러진 모습으로만 각인되었고, 무능한 왕과 간악한 후궁을 둘러싼 권력쟁탈의 소굴로 전락해버린 왕실은 시청률 경쟁을 주도한 궁중사극의 무대로만 남게 되었다.
영친왕과 일본 왕족 이방자 여사의 아들인 이구씨는 어쨌든 조선 왕실의 적통이다. 그렇다면 그는 조선 왕실을 일본 왕실에 편입시켜 내선일체를 도모한 일제의 치밀한 정치공작의 희생자다. 이처럼 한일합병의 살아있는 유산인 그가 말년에 대한민국 정부의 망각 속에서 국제 미아가 되어버린 것은,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일본이 헌법 제1조에서 천황을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떠받들고 있는 현실과 너무나 비교된다. 일본이 한국보다 더 영악하게 독도 문제에 대처한다는 뜻으로 ‘일본이 한 수 위’라고 말한 죄 없는 가수 조영남을 거대 공영방송이 찍소리 못한 채 ‘짤라야’할 만큼 거센 민족정서가 이런 문제엔 왜 담담한가? 총리는 영결식 조사에서 “광복 60주년이 되는 해에 (을사조약) 백년의 역사를 훌훌 털고 사랑하는 부모님 곁으로 가시길 기원한다”고 말했지만, 오욕의 역사는 한 개인에게 훌훌 털어버리라고 기원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 망각으로 일관하다가 쓸쓸한 주검으로 돌아온 자신에게 때늦은 관심과 조의를 표하는 정부와 언론이 고인은 오히려 야속할 것이다.
왕실을 착취계급으로 단정한 북한의 역사관과 우리의 역사관이 만약 다르다면, 강탈당한 대한제국의 대외적 위신을 한일관계를 보는 국민정서에 맞게 복원할 방책이라도 나와야 한다. 과거는 청산의 대상만이 아니다. 복원의 대상이기도 하다. 일제 유산을 청산하는 일은 빼앗긴 왕실의 위신과 전통을 복원하는 일과도 맞닿아야 한다. 마지막 황태손의 죽음이 ‘광복 60주년’을 맞아 우리에게 남긴 숙제는 이것이다. 왕실을 복원하자는 말이 아니다. 왕실이 국가의 위신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언행의 품격까지 모범으로 보여주는 영국이나 스웨덴 같은 나라는 못되더라도, 도둑맞은 왕실의 위신을 상징적이나마 복원하는 여유를 가진 나라는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에 대한 중국 정부의 모욕은 한국의 마지막 황태손 이구씨에 대한 한국 정부의 망각보다 차라리 인간적이다. 적어도 그들은 푸이를 잊지는 않았다. 밉든 곱든 분명히 한국 역사인 조선 왕조를 경복궁이나 종묘제례로만 보존할 것이 아니라 매듭지어야 할 무형의 숙제로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권용립/경성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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