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7.26 17:47
수정 : 2005.07.26 17:48
아침햇발
옛안기부(국정원) 불법도청 테이프 사건이 중앙일보사와 삼성의 사과문 발표까지 정신없이 번져나간 뒤 일단 숨고르기에 들어간 듯하다. 이쯤에서 삶에 지친 평범한 시민들의 관심과 분노 또한 한풀 꺾일지 모르겠다. 돈 몇 푼을 위해 비지땀 흘리는 이들이 “두 명이서 15개를 운반하는 데는 문제가 없는데 30개는 무겁더라” 같은 이야기 자꾸 되새겨봐야 남는 건 짜증과 분노뿐이다. 그러니 “모두 도둑놈이야”라고 결론짓고 당분간 신경 끊는 게 속 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무리 살기 바쁘고 힘들어도 한 가지만은 꼭 기억하자. 언론 문제 말이다. 이번 사건은, 언론이 정치와 자본의 핵심 연결고리 구실을 한 전형적인 사건이다. 녹취록에서 드러난 유착 양상은 충격적이리만치 생생하다. 언론 문제가 중요한 건 이 때문만은 아니다. 언론은 마치 공기처럼 피할 길이 없다. 또 삼성이나 정치권력이 제 아무리 막강해도, 언론이 살아있으면 견제할 수 있다. 언론은 사실을 정반대로 뒤집을 힘도 있는 막강한 존재다.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의 고독>에는 바나나 농장 노무자 학살 이야기가 나온다. 노무자들이 파업을 벌이자 정부는 쟁의를 조정하겠다며 모이게 해놓곤 무자비하게 발포한다. 이 틈에 끼여 있던 한 사람이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주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열차 안이었다. 홀로 탈출한 그가 3000명의 학살을 증언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 정부가 모든 언론 매체를 동원해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고 수천번 되풀이해 발표한 탓이다. 그 사이에도 소요자 색출과 처형은 계속된다. 유일한 목격자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된다.
이 이야기가 소설 속 허구만이 아니라는 걸 우린 잘 안다. 25년 전 광주항쟁 때를 빼닮았기 때문이다. 광주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기에, 안기부 도청팀장으로 지목된 공아무개씨의 ‘경고’가 더욱 마음에 걸린다. 그는 <에스비에스>와 인터뷰에서 보수 신문 두 곳을 구체적으로 거명하면서 “자기들은 가장 정도를 걸어온 것처럼 하는데 정말 역겹다”고 말했다. 방송까지 싸잡아 비난한 그는 “언론 다 자유로울 수 없다. 언제 너희들이 발칵 뒤집어질 날이 있을지 모른다”고까지 했다. 도대체 언론이 어떤 짓을 했길래, 일개 전직 안기부원에게 이런 막말을 듣는 처지가 됐나?
또 한 가지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 1997년 10월7일 도청 테이프에 등장하는 어떤 신문 이야기다. “○○일보 사주 일가가 모여 차기 대통령 문제에 대해 논의 끝에 ‘누가 되든간에 김대중이가 되는 것은 절대 막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고 그 자리에서 ○○○ 주필을 불러 의견을 물었더니 ○ 주필 역시 공감하여 ….”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이런 이야기가 ‘있을 수 없는 헛소문’으로 여겨지지 않고 ‘있을 수 있는 이야기’로 취급된다는 것 자체가 언론의 비참한 현실을 반영한다. 게다가 당시 신문들의 보도 행태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턱없다고 치부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탈리아의 혁명운동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신문이나 평론지도 ‘정당’이거나 ‘정당의 조각’이거나 아니면 ‘특수한 정당으로서의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하면” 지배집단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다고 썼다. 그가 이 글을 쓴 1930년대 유럽과 겉으로는 전혀 다른 상황과 맥락에 있는 오늘날에도 언론을 이해하는 데 이만큼 적합한 관점이 과연 있을까?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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