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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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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재갈. 말을 부리려 입에 가로 물린다. 쇠뭉치다. 여기에 고삐를 맨다. 순종할 수밖에 없다. 그 재갈을 한국 언론에 물리겠다고 누군가 공언했다. 그것도 방송기자와의 인터뷰 자리였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는 단언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 흥분시키면 진짜 언론 재갈 다 물려 놓을 거야.” 서슬 시퍼렇다. 누구일까. 생뚱맞게도 불법도청의 팀장이다. 콧방귀 뀔 일이 아니다. 보라. 무람없이 범행을 시인했다. 도청만이 아니었다. 주요 인물을 감시하고 미행했단다. 살천스레 경고했다. “나를 건드리지 말라.” 마침내 ‘자해 소동’까지 빚은 그는 언론에 자술서를 배포했다.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 “아첨, 중상모략, 질투”가 있다고 폭로했다. 더 생게망게한 것은 재갈 협박을 받은 언론이다. 도청팀장은 자신이 입을 열면 다치지 않을 언론사가 없다며 눈을 홉떴다. 게다가 명토박아 거명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에스비에스 다 똑같아. 문화방송은 다른가, 한국방송도 똑같지.” 심지어 <중앙일보> 홍석현 ‘사주’를 비판하는 언론사들한테 자격이 있는지 비아냥거렸다. 그럼에도 ‘명예’ 훼손된 언론사들은 궁따고 있다. 딴은 짐작 못할 일도 아니다. <조선일보> 방씨와 <동아일보> 김씨 이야기가 솔솔 돌고 있지 않은가. 다만, 얼키설키 엮인 실타래를 풀려면 실마리부터 꼭 잡아야 옳다. 방씨와 김씨의 테이프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 테이프를 풀 실마리 또한 역설이지만 홍씨에게 있다. 홍석현. 한때 언론현장과 학계에서 ‘계몽군주’로 불린 인사다. 하지만 그가 ‘밀실’에서 어떤 일을 꾸미는 사람인지 또렷하게 드러났다. 권력 중의 권력인 언론권력, 그 가운데 계몽군주의 실체는 정작 얼마나 초라한가. 결코 착각하지 말 때다. 홍씨는 고작 재벌의 ‘검은돈’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심부름꾼’이 부자신문의 최종 결정권자라는 데 있다. 홍씨가 대선후보와 삼성을 넘나들 때다. 중앙일보는 편파보도의 절정을 달렸다. 기자가 후보지원 문건까지 작성했다. 노골적 정략보도를 꼬집는 시민사회를 겨눠 “사실 보도를 왜 트집잡나”며 언구럭 부리는 사설도 냈다. 조세포탈로 구속될 때 홍씨에게 “힘내세요” 응원했던 보도 자세도 달라지지 않았다. 불법 도청범의 협박을 대서특필한 1면 편집은 그 연장선이다. 도청범의 협박은 어느새 신문 사설의 ‘협박’으로 이어진다. 자칫 ‘언론 전쟁’이나 ‘정치 음모론’ 따위로 본질이 흐려질 판이다. 하지만 아니다. 불법 도청범이 언론에 재갈을 물리겠다고 호언하는 세상은 분명 물구나무 서 있다. 물구나무의 ‘비결’은 한국언론의 ‘황제 경영’에 있다. 사주의 약점을 잡아 언론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발상, 기실 그것은 군부 쿠데타 시절의 ‘전통’이었다. 그 전통은 정보기관의 퇴직인사가 언론에 재갈을 물리겠다고 호기를 부리는 데서 살아난다. 군부 퇴각 뒤 언론에 가장 큰 힘을 휘두르는 재벌 또한 ‘사주’들을 매개로 그 전통과 맞닿아 있다. 바로 그래서다. 언론사 ‘사주’로서 기본조차 없는 부라퀴들이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 보도를 짓밟는 야만에 마침표 찍을 때가 되었다. “노조와 호남은 아무리 아부해도 안 된다”고 대선후보에게 조언하는 ‘계몽군주’를 보라.홍씨의 주미대사 사퇴로 그칠 일이 아니다. 사주들이 신문을 쥐락펴락 할 수 없도록 소유구조 개혁에 다시 힘을 모을 때다. 벅벅이 벗겨야 한다. 언론인의 말을 부리려 입에 가로 물린 저 재갈을. 손석춘/논설위원 s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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