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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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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역시 삼성이다. 세계 초일류 기업답게 아무리 큰 역경에 빠지더라도 교묘하게 궁지를 탈출한다. 1997년 대선에 즈음한 삼성의 불법로비 의혹이 담긴 도청 테이프(엑스파일)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삼성은 ‘엑스파일’이 공개된 뒤 잠시 충격을 받는 듯했지만 곧바로 정신을 가다듬고 이례적으로 ‘사과문’을 냈다. 사과의 진실성에 대한 시비는 삼성한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삼성은 사과문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언론과 검찰, 그리고 정치권에 보냈다. 이번 사건의 핵심을 ‘불법도청과 무책임한 공개 및 유포’라고 규정하고, ‘개인의 인권 확보와 우리 사회의 민주 발전을 위해 (불법도청은)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번 사건을 풀어나갈 ‘모범 답안’을 제시한 셈이다. 삼성의 이런 ‘지침’을 충실하게 따라서일까. 삼성-중앙일보 사주-검찰과 정치권으로 이어지는 추악한 불법로비 의혹에 대한 진상 규명은 온데간데 없고, 언론이나 검찰, 정치권의 관심이 온통 불법도청 자체에 쏠려 있다. 가장 먼저 방향을 틀어 준 게 역시 눈치 빠른 보수언론들이다. ‘대통령 빼고 다 도청했다’, ‘김영삼 부자 도청 개입 의혹’, ‘도청 테이프 조작 가능성’ 등 날마다 새로운 주제를 들먹이며 독자들의 관심을 불법도청 쪽으로 몰아가고 있다. 거기에다 당시 불법도청을 주도한 공운영 ‘미림’ 팀장의 자해 사건까지 벌어졌으니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검찰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엑스파일 유포 행위는 아직 시효가 남아 있다”며 유포 행위에 포함되는 언론 보도에 대해 수사할 것임을 비쳤다. 도청 테이프를 <문화방송>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진 재미동포 박인회씨를 긴급체포하는 신속함도 보였다. 삼성의 불법로비 행위보다는 불법도청과 유포 행위의 위법성에 수사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셈이다. 정치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늘 그랬던 것처럼 본질은 내팽개친 채 검찰 수사가 먼저냐 특검이 먼저냐를 두고 지루한 정쟁을 시작했다. 여당도 ‘도청 지휘책임의 전모를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불법도청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 점에서 언론이나 검찰이 불법도청 근절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들이 조장한 ‘도청 추문’에 홀려 있는 사이에 ‘삼성’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불법로비 의혹의 당사자인 삼성이 어느새 국민들의 관심권에서 멀어진 것이다. 그동안 삼성이 언론과 검찰, 정치권 등에 뿌려댄 검은돈의 위력 때문일까. 이제 판세는 삼성이 내린 ‘지침’대로 ‘불법도청과 무책임한 공개 및 유포’를 경쟁적으로 파헤치는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이래도 되는 건가? 삼성의 불법로비 의혹은 불법도청에 밀려날 만큼 가벼운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훨씬 크고 구조적이며, 우리 사회를 뿌리째 썩게 만드는 암적 존재다. 엑스파일에는 삼성이 검은돈으로 우리 사회의 중추 세력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조종해 왔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이제 언론이나 검찰, 정치권은 불법도청에 들이댄 것보다 훨씬 강력한 칼날을 삼성의 불법로비 의혹 쪽에 겨눠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인권 확보와 민주 발전’을 위해 불법도청을 뿌리뽑아야 한다고 외치는 보수언론이나 검찰, 정치권은 결과적으로 불법로비의 당사자인 삼성에 ‘충성 경쟁’을 벌이는 셈이 된다. 언론과 검찰, 정치권이 이번에도 삼성을 단죄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삼성공화국’에서 ‘삼성제국’으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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