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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29 18:07 수정 : 2005.07.29 18:11

정재권/정치부 기자

편집국에서

2003년 1월로 기억난다.

그 전 해에 치러진 16대 대선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던 그 때, <한겨레>는 적잖이 뜨거운 ‘정치적 논쟁’의 내부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당시 몇몇 구성원이 진보 성향의 한 정당에 가입해 있던 게 신문사 윤리강령(우리는 정당에 가입하지 않으며, 특정정당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제기된 탓이다.

언론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훼손이냐, 정치적 자유의 확대냐를 놓고 치열한 토론이 이어졌다. 마침내 회사 윤리위원회는 내부 구성원을 상대로 언론인의 정당 가입에 대한 찬반투표까지 벌였다. 정확하진 않지만, 반대표가 찬성표보다 좀더 많았고, 그 뒤 논쟁의 불길은 조금씩 사그라들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2년이 훨씬 지나,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던 당시 일이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옛 안기부 불법도청 테이프(엑스파일) 때문이다. 1997년 15대 대선에서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 대선후보 진영에 100억원 안팎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이 언론의 ‘공공성’ 문제를 다시 떠올리게 한 것이다.

씁쓸했다. 정치와 재벌, 언론의 삼각고리 속에서 ‘돈 심부름꾼’으로 전락한 신문 사주의 초라함에 헛웃음이 났다.

그리고 화가 치밀었다. 불편부당이라는 허울 뒤에 숨어 저지른 언론의 불법 행태가 너무 적나라해 얼굴이 화끈거려서가 아니다. 정치와 선거 보도에 관한 한 ‘반쪽짜리’인 우리 언론의 처지가 온전해질 길이 더욱 멀어졌다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현행 선거법에 따라, 공정보도는 언론기관의 의무다. 선거에서 언론의 특정 후보 지지를 금지한 것이 대표적인 보기다.

하지만 이는 어느 시기, 어느 사회에서든 일관되게 관철되는 ‘절대 명제’가 아니다. 시야를 조금만 넓히면, 후보 지지와 같은 정치적 의사표시를 허용하는 나라는 많다.


2004년 11월의 미국 대선을 코앞에 둔 10월17일 <뉴욕타임스>는 존 케리 민주당 후보 지지를 공식선언했다. 이 신문의 그날치 사설은 이라크 전쟁에서 보여준 무책임성과 부자에 대한 감세정책, 시민권 약화 등을 이유로 조지 부시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한 뒤, 이렇게 끝을 맺는다.

“모든 유권자는 각 후보자의 과거 전력, 정책적 우선순위, 그리고 성품을 근거로 지지 후보를 결정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근거로 우리는 존 케리를 대통령으로 열렬히 지지한다.”

이런 지지 선언과, 케리 후보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뉴욕타임스의 권위는 훼손되지 않는다. 이 신문의 기사가 지닌 균형과 객관성에 대한 변함 없는 신뢰 때문일 게다. 이 신뢰와 함께 후보 지지라는 정치적 자유는 생명력을 키워간다.

미국 안에서도 언론의 후보 지지가 바람직한지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지만, 언론사에 이런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는 것 자체가 한 차원 높은 사회적 성숙도의 방증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걱정스럽다. 미국처럼 후보나 정당에 대한 언론의 지지표명을 인정해 달라거나, 유럽처럼 언론인의 정당 가입을 허용하라는 요구가 나오게 될 때, 그 문제 제기가 맞부닥칠 벽이 한층 두터워졌다는 게 염려스러워서다.

뒷전에서 정치자금을 전달하고, 어떻게든 표시나지 않게 특정 후보를 지지할지에 골머리를 싸매는 우리 언론에 아예 공개적으로 ‘칼자루’를 쥐어주라고?

이런 반박에 답할 길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랴. 공공성과 정치적 자유라는 두 날개로 날고 싶은 언론의 꿈과, 그런 꿈이 용인되는 성숙한 사회에 대한 기대를 접을 수는 없으니.

?j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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