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7.31 17:36
수정 : 2005.07.31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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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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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1969년에 나온 미국 서부영화의 걸작 <내일을 향해 쏴라>는 은행털이를 소재로 하고 있다. 로버트 레드퍼드와 폴 뉴먼이 낭만적인 은행강도 역을 맡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하나 영화는 영화일 뿐, 현실에서 은행털이가 낭만적일 수는 없다.
요즘 은행을 비롯해 금융회사를 터는 ‘간 큰’ 사람은 주로 직원들이다. 얼마 전 국민은행과 조흥은행에선 직원이 양도성예금증서 위조로 850억원을 챙긴 뒤 국외로 도피한 금융사고가 터졌다. 금융사고가 잦다 보니 사고액이 웬만하지 않으면 뉴스거리도 안 된다. 지난해 564건의 금융사고가 발생했다. 휴일을 빼면 하루 평균 두건꼴이다. 올해는 7월까지 시중은행 통계만 나와 있는데, 지난해와 비슷하다. 하루 1.5건꼴이던 2000년과 견주면 증가세가 자못 심각하다. 행태도 달라졌다. 과거 대형 금융사고는 불법대출이나 외부인이 주도한 금융사기가 주류였는데, 최근 몇년 통계를 보면 직원이 저지른 게 많다. 지난해 금융사고 중 67%가 직원의 횡령이나 유용이다.
물론 부도덕한 일부 금융인들의 도덕적 해이가 원인이다. 금융시스템이나 감독체계가 허술한 탓도 있을 게다. 하지만 충분한 설명이 안 된다. 수출이나 물가, 인구 등 해마다 늘거나 높아지는 통계에 익숙해 있어 금융사고가 늘어나는 것도 그러려니 할지 모르나, 성격이 다르다. 시스템이 보강되고 감독도 강화되면 사고가 줄어야 정상이다. 도덕적 해이만으로는 금융사고가 늘어나는 이유까지 설명하지 못한다. 금융인들의 도덕성이 과거보다 떨어져서일까? 합리적 가정이라고 할 수 없다.
무엇이 금융인들을 ‘돈의 유혹’에 더욱 빠져들게 하는 걸까? 만연한 한탕주의와 깊어져 가는 고용 불안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 보는 금융전문가들이 적지 않다. 같은 생각이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된다는 천민자본주의 의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다. 딱히 근거를 댈 길은 없으나 외환위기 뒤 양극화가 깊어지면서 이런 경향이 더 심해진 듯하다. 땀흘려 번 소득의 의미는 갈수록 왜소하게만 느껴진다. 열심히 일해도 치솟는 집값을 메울 길 없어 낙담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불법과 편법을 넘나들면서도 아무 탈 없이 큰돈을 만지고, 부동산 투기로 수억, 수십억원을 벌었다는 이들의 얘기가 주변에서 심심찮게 들린다. ‘에라 나도 한번….’
거기다가 금융회사의 고용 불안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은행은 한때 가장 안정된 직장이었지만, 평생직장이란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다. 제2 금융권은 더하다. 금융회사 직원은 경쟁력의 원천으로보다 비용 요인으로 치부되고, 사람을 많이 잘라내면 능력 있는 최고경영자로 평가받고 있다. 퇴직한 뒤 이것저것 손댔다가 실패하는 선배들의 초라한 모습이 자신에게 투영된다. 매일 거액을 만지지만 앞날은 불투명하다. 한몫 챙겨야겠다는 유혹은 강해진다. 비약인가? 꼭 그렇지만도 않다. 구조조정이 예상되는 금융기관에서 사고가 더 많이 일어나는 걸 보면 상관관계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부끄럽게도 국제 금융시장에서 한국은 금융사고가 많은 나라로 통한다고 한다. 불로소득, 한탕소득이 땀흘려 일하는 이들은 물론 법망과 세무당국까지 비웃으며 활개치고, 고용 불안이 깊어지는 한 금융사고 역시 줄기 힘들 것 같다. 이래선 동북아 금융중심 꿈도 요원하다. 행여 나쁜 마음 먹고 있는 금융인이 있다면 상기시킬 게 있다. 영화 속 두 주인공도 결국 쏟아지는 총알 속에서 종말을 고했다.
김병수 논설위원
byung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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