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7.31 17:45
수정 : 2005.08.03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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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자 가톨릭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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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은 ‘압축적 성장’ 만큼이나 ‘압축적 부패’를 경험해 왔고, 이에 대한 둔감증도 압축적으로 확산되어 왔다. 이는 잇따른 충격과 분노가 폭발수위에 달하면서 자기보호 본능에서라도 체념과 포기로 돌아서버리는 증세가 누적된 결과다. 그게 아니라면 드라마 이상의 극적인 현실을 냉소주의적 즐거움으로 곱씹는 재미로 사는 사람들도 있다. 이 상황에서 국민소득이 올라가는 것에 비례하여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그런데 이는 한국적 상황의 특수성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병행해서 발달해온 역사는 이미 그 한계를 드러냈다. 자본의 축적이 노동자 다수를 먹여 살리고 두터운 중간층을 형성하면서 이들이 다수의 민주적 주체로서 나서는 정치를 실현시킨다는 도식은 이제 적용되기 어려워졌다. 자본의 독점체제가 전 세계를 전쟁터로 만드는 것은, 오직 그네들만의 헤게모니 싸움을 위해 노동자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우면서 희생시키는 것일 뿐이다. 노동자들은 구조적으로 점점 더 줄어드는 일자리에 매달려 그들끼리 치열한 생존싸움을 벌이거나, 일터에서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에 떨어야 하거나, 아예 ‘잉여인간’으로 내몰리는 각오를 해야 하는 형국에 이르렀다.
이처럼 우리의 목숨이 전적으로 자본의 논리에 달려 있고 또한 정치 역시 자본의 논리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면, 민주주의 역시 자본의 힘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 자본이 극소수에 의해 독점되는 체제에서 민주주의는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 자본의 힘으로 만들어내는 유령의 다수가 민주의 이름으로 자본의 하수인 노릇을 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자유경쟁이 아닌 독점시대로 접어든 이후부터 민주주의는 다수로 위장된 소수의 금권정치로 타락하는 역사로 접어든 것이다.
게다가 한국처럼 부정부패가 정치관행으로 뿌리내린 상황에서, 또한 재벌독점 체제의 위력과 오만이 노골화되는 상황에서 그 폐해는 당연히 가중될 수밖에 없다. 작금 전면에 떠오른 ‘삼성공화국’의 실체는 정치가 자본의 들러리나 앞잡이 노릇을 하고 국가가 이를 민주주의로 포장하는 우리의 현실을 비웃는 듯하다. 삼성의 자본은 시장을 교란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언론을 넘어서 대학과 학계에까지도 위풍당당하게 침투하고 있지만 이것이 민주주의를 무력화하는 것에 대한 우리 사회의 경각심은 아직도 미미하다.
프랑스 시민운동가인 알베르 자카르는 주류경제학에서 규정해온 ‘교환’ ‘가치’ ‘소유’의 소위 보편적 개념들이 인간관계를 심각하게 왜곡시켜온 역사, 그리고 서구식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일종의 노예제도로 변질되어온 현실을 지탄한다. 이 노예제도는 바로 민주적 주체가 되어야 할 다수를 돈의 제물로 삼는 것을 말한다. 자본주의가 소수의 독점을 위한 것이라면 다수의 노예화는 불가피한 것이며, 따라서 다수를 위한 민주주의는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소수의 자본독점을 불가피한 것으로 전제한 상태에서 민주주의를 말한다면, 그것이 어느 이름의 재벌공화국이든 또 어느 집단과 정권의 부정부패든, 자본과 민주의 공생관계는 근본적으로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새삼, 다시 한번, 자본과 민주의 공생관계를 진지하게 따져보아야만 한다.
이영자/가톨릭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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